사장이 괜히 사장이 아니네

by 김커선

신입사원으로 갓 입사 후 내 첫 발령지는 부산이었다. 사회 초년생으로 누구보다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가 새록새록하던 때였다. 그런데 무연고지라니, 부산이라는 낯선 곳에서 일에 집중하자면 여러 성가신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야 했다. '누가 물어보면 남자친구 있다고 해야지' 소모적인 일에 신경 쓰는 걸 싫어하는지라 행여나 신입사원이라고 이래저래 이성관계로 엮을까 봐 나 혼자 지레 손사래를 쳐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대학시절을 통틀어 소개팅 한 번 나가 본 적이 없을 정도인데, 나는 참 괜한 걱정을 사서 하는 중이었다.


나의 철저한 준비성이 빛을 발하듯, 어느 따스한 봄날 사무실 선배들이 문득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어왔다. 거짓말하는데 약간의 찔림을 느끼면서도 나는 미리 준비한 대로 남자친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즉각 덧붙였다.

"외국인이에요."

남자친구가 부산에 오면 함 데리고 와라 마라, 상황이 복잡해지는 걸 사전에 차단해야 했다. 2000년 중반만 해도 외국인과의 커플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뭐 하는 친구냐 후속 질문이 이어졌고 역시나 찔리는 마음으로 나는 친구에 대해 간단한 브리핑을 이어갔다. 사실 완전히 허구의 인물을 지어낼 정도로 내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헤어진 지 일 년이 좀 넘었을 이전 남자친구의 신상을 현 남자친구로 둔갑시켜야 했다. 잘 지내지?


그러고 보면 내가 남자친구라는 사람과 통화를 하지도 문자를 하지도 않는데 사람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나를 워낙 특이한 캐릭터라고 생각들 해서인지 '그래 쟤라면 뭐 그럴 수도' 그러려니 했을 수도 있다. 나는 거짓말에는 영 허술해서 어째 핸드폰에는 남자친구라는 사람의 사진 한 장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지가 지입으로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는데 안 믿을 수도 없고 정작 하는 거 보면 있는 거 같진 않고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어쨌건 남자친구가 있는 것으로 인정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한 일 년쯤 되어가자 나는 나한테 남자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가고 있었다. 그건 사무실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쟤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건지 계속 만나는 건지 알쏭달쏭해했다. 물어보기도 그렇고. 이쯤되니 나는 정확한 스탠스를 취하는데 내적 갈등을 겪게 되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회사 전 직원이 제주도에 모여 신년워크샵을 하고 있었다. 첫째 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는 사장님 근처에 앉게 되었다. 사장님은 어릴 적 외국으로 이민 가서 외국국적을 가진 한국인이자 검은 머리 외국인이었다. 그때 왜 내 남자친구가 외국인이라는 게 화제에 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또 다시 본의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된 나는 약간 겸연쩍은 태도를 취했는데, 그때 사장님이 불쑥 질문을 던져 왔다.

"남자친구 이름이 뭐예요?"

어라? 지금까지 누구도 남자친구의 이름을 물어본 이가 없었는데. 그것도 사장님이 내 남자친구의 이름을 질문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바였다. 나는 이제는 헤어진 지 이년이 넘었을(잘 지내지?) 이전 남자친구의 이름을 급작스레 떠올리며 더듬대듯 대답했다. 사장님은 그 순간의 머뭇거림을 귀신같이 낚아챘다.

"남자친구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그때 뭐라고 반응했는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이름을 묻다니, 이름을 묻다니...' 기습 질문에 허를 찔린 게 꽤나 억울한 심정으로 남았다.


신입시절 첫 사장님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사내에서 직원 누구를 만나도 자신을 낮추듯 깍듯이 인사부터 했다. 그러나 뒤에서는 크고 작은 협상을 이끌며 냉정한 면모를 가감 없이 발휘한 일화들이 넘쳐났다. 역시나 그때의 그 사장님은 이후로도 굵직한 외자제약사의 사장을 두루 역임하며 미디어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사장은 괜히 사장이 아니었다. 이따금 사장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그때 그 사장님의 예리하게 허를 파고들던 '질문'이 생각난다. 사장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역시 사장이야, 속으로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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