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인대, 견디고 참고 기다려라

by 김커선

올 6월, 1년간 근무하던 약국이 문을 닫았다. 애초 청계산 골짜기에 약국을 열다니 번연한 결과였다. 약국장은 퇴직금을 피할 심산으로 1년에서 딱 일주일 모자란 날짜를 골라 나를 해고했다. 평소 봐온 인간의 결 그대로라 놀랍지도 않았다.


세상은 마냥 녹록치 않았다. 퇴직금은 피했지만, 해고 예고수당은 피하지 못했다. 해고 통보가 30일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약국장은 원칙적으로 한 달치 월급을 줘야 했다.


나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쏜살같이 약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대전에서 일했다.
“야, 너 나한테 해고예고수당 줘야 한대. 몰랐지롱~”
그게 나의 첫 번째 실수였다.


약국장은 해고통보일이 며칠 전이었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씨알도 안 먹혔다. 그러자 해고일을 슬쩍 바꿨다. 근로자 동의 없는 해고일 변경은 불가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전지전능하며 절대 선이라고 믿는 나르시시스트. 상황은 점점 꼬여갔다.


얼마 뒤 노무사의 이름이 찍힌 내용증명이 날아왔다. 사실 관계가 맞지 않았다. 나는 분노에 못 이겨 조목조목 반박 내용증명을 보냈다. 그게 두 번째 실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국장이 합의를 제안했다. 나는 거절했다. 돈보다 중요한게 있었다. 자존심. "니가 옳냐, 내가 옳냐 한번 겨뤄 보자고."


퇴사일을 기다리며 곧바로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었다. 한 달 안에 끝날 줄 알았던 일은 검사 손에까지 넘어가며 길어졌다. 최종 결과는 ‘해당 없음’. 검사는 약국장의 손을 들어줬다. 근로감독관은 서면으로 끝낼 일을 일부러 전화로 통보했다. 자분자분 설명하며 나를 위로했다.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돌아보면, 다 이긴 싸움을 걷어찬 건 나 자신이었다. 처음 해고일을 받아들고서 모른척 태연히 버텼다면, 물구나무 서서 싸워도 이겼을, 승률 백프로 싸움이었다. 첫 번째 치명적인 실수, 나는 시간을 인내하지 못했다.


두 번째 치명적인 실수, 분노를 견디지 못했다. 즉각 내용증명을 보내며 내가 가진 정보를 죄다 넘겨준 셈이었다. 상대는 그 자료를 근거로 전략을 수정했고, 판례를 찾아 제출하며 판을 뒤집었다.


조용히 기다리지 못한 대가는 컸다. 돈은 물론이고 그보다 중한 내면의 평화를 잃었다. 석달간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며 내면의 평안함이 자주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피가 말랐다.


결과를 통보받은 날, 나는 다음 단계를 고민했다. 이미 구상해둔 ‘약국장을 물먹이는 방법’이 머릿속에 여러 가지 있었다. 정의감인지 복수심인지 모를 불꽃이 피어올랐다. “오늘도 불철주야 일하는 수천만 근로자 동지를 대신해서라도, 이런 부당한 결과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럴싸했지만, 실은 분노의 다른 얼굴이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다른 선택을 했다. 예전같으면 끝까지 들이박았겠지만, 이번엔 멈추기로 했다.

"비인(匪人). 사람같지 않은 존재. 그런 이와 더는 얽히지 말자."

차라리 내가 지자. 어차피 나쁜 기운의 돈은 받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 뜨거운 여름을 지나며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배웠다. 참지 못하는 즉각성은 때로 장점이었지만, 세상을 너무 빨리 태워버리는 불이었다. 긴 호흡이 필요한 일들에 어울리지 않는 성미였다. 이제는 느리더라도 오래도록 타오르는 불이 되자고 결심했다.


무렵 우연처럼, 그러나 운명인 듯 글귀 하나를 선물받았다.

堪·忍·待.

감·인·대 -- 견디고, 참고, 기다려라.


결론이 더디어도 좋다. 마음이 들끓을수록 멈춰 서라. 진짜 강한 사람은 칼을 뽑는 사람이 아니라, 칼자루를 잡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감·인·대.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가르침이었다. 가르침은 비쌀수록 귀하다. 여전히 미치고 펄쩍 뛰고 싶은 순간이야 다분하지만, 이제는 끝까지 견디고 참고 기다려보려 한다. 스스로를 놓아버릴 수 있는 지점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다. 궁금한 마음이다.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아휴, 얼마든지 드릴게. 나는 신경쓰지 말고, 하시던 거 마저 계속 하세요."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의 숙명처럼, 이제나 저제나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나 역시 '때를 위해' 묵묵히 견디고 참고 기다리며, 명랑하게 오늘을 살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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