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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생긴 후 업무 몰입도가 높아진 썰.txt

대체 불가능한 존재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업무에 집중할 동력 생기다

by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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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 다 담그고 있지 않아서야.”


나보다 많은 사회 경험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내게 냉철한 조언을 아끼지 않던 지인이 내게 한 말이다. 인턴으로 시작했던 첫 회사에서 내가 부당한 평가를 받은 뒤 그에게 불평을 털어놓을 때였다. 아니 뜬금없이 그 얘기가 왜 나와. 내가 회사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 일단 그것 때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애써 내게 뼈가 되는 조언을 한 지인에게 내가 보인 반응은 이렇듯 방어적이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말이 생각나는 걸 보면 정말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회사에서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두 발 다 담그지 않는 습관은 내 오랜 관성이다. 요가 시간에 다리를 찢으며 다른 생각에 젖어 있는 내게 요가 강사는 동작을 대충 하지 말라는 의미로 등을 지긋이 눌러주고 간다든지,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영혼 없는 리액션을 보며 친구의 원성을 사는 식이다.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는데, 뭔가 집중하는 일이 귀찮고 부질없게 느껴졌던 기억이 이런 습관의 시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작 이런 습관 때문에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뭔가 다른 꿍꿍이를 벌이고 있단는 인상을 주는대도 그렇다. 상사에 대한 나의 이런 평가가 억울하다고 느껴도, 앞으론 달라지겠다고 마음만 먹을 뿐 원래의 관성대로 일하기 일쑤였다.


별 수 있나, 생긴대로 살아야지. 하며 나를 포기하려도 할 때쯤 변화의 계기가 생겼다. 내가 두 발 다 담그지 않으면 나나 상대방이나 모두 '폭망'하는 관계를 맺게 되면서다. 바로 엄마와 아이의 관계다. 먹고 싸고 입는 기본적인 모든 행위를 내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아이의 존재는, 나를 이 세상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었다. 아이를 돌보는 시간에 내 자신이 함몰될수록 내가 그 동안 누려웠던 '나'라는 테두리가 절박해졌다. 직장은 그 테두리를 유지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나 없이 어린이집에서 적응할 아이를 생각하면 심란하면서도, 또 빨리 직장에 가서 '사회적 나'를 찾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간절했다. 그렇게 복직할 때의 나는 그 이전과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회사에서의 내 자리가 너무 소중하고 절실했다.


이런 내가 가장 걱정한 순간은 아이가 아플 때다. 아이와 모든 날을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아이가 아플 때만큼은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아이가 언제 아플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플 때 옆에 있어주려면 하루라도 회사를 쉴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도 여유롭게 일하면서 집중하지 않는데, 아이 핑계 대면서 또 쉬러 간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일하는 시간이라도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애엄마라서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갑자기 부서 회식이라도 생기거나 야근이 생기면 시어머니나 어머니의 손을 빌렸다.


퇴근 후에는 일에 일절 손대지 않던 나의 일상도 조금씩 바뀌었다. 퇴근하고 집에서라도 1~2시간 정도 일을 해서 다음날 출근할 때 조금 더 수월하게 일을 처리하고,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 퇴근하되 그전까지 그 날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도록 결과물을 중심으로 일했다. 내 역량을 벗어난 일의 경우 미리미리 보고해서 후속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퇴근 시간이나 장소와 무관하게 결과물 중심으로 일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일하는 시간이 적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를 대하는 상사의 태도가 달라졌다.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10분 일찍 퇴근해보겠다는 요청에도 1시간 더 일찍 퇴근해도 된다는 등 선처를 받기도 했다. 계기까지 묻지는 않았지만 일하는 시간 동안 최대한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출근시간에 촉박하게 회사에 와서 멍 때리다 밥 먹고 퇴근하는 지난 시절의 나와 비교되는 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더 피곤해졌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퇴로를 생각하기보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얻은 반응인 것 같았다.


baby-2416718_1920.jpg 아기는 그 존재만으로도 놀랍다. 일단 내 삶이 이토록 누군가에게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개인적인 성취에서 육아로 바뀌면서, 지금의 회사에 다녀야 하는 동기가 확실해졌다. 이 회사는 그나마 연차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현장퇴근 후에는 아이를 돌볼 수 있다. 여성의 일 가정 양립에 관대하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당연한 노동자의 권리인 이 부분을 돋보이게 만든다. 삶의 목적이 생기고 우선순위가 정해지니, 내가 하는 일과 그 의미도 자연스럽게 다시 정의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회사도 아니고 이직 기회도 열려 있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이 회사를 먹고 사는 수단으로 담담하게 대하면서, 아이를 내 삶의 중심에 둘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두 발 다 담그라는, 지인의 조언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실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삶의 목적이 분명해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내 목적이 일과 가정의 양립에 있는 지금, 아이와의 시간에는 최대한 아이엑 집중하고 일하는 시간에는 최대한 일에 집중하는 것이 두 발 다 담그라는 메시지의 구체적인 실천이다. 일터에서 나와 집으로 또다시 출근하는 것 같고, 일주일이 배로 길게 느껴지지만 아기와 같이 기절해 잠들고 일어나 보면 아기는 언제 그랬냐는듯 훌쩍 커 있다. 이 황망한 일상의 결말이 회사에서의 나와, 엄마로서의 나를 잘 다독이며 이끌어가는 '성장한 나'에게 귀결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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