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독자를 찾아서>, 저널리즘의 미래를 말하다
가끔 한 종합편성 채널의 드라마 <라이프>를 보곤 한다. 처음엔 존엄한 생명을 다루는 의료 영역의 공공성과 여기에 이익 실현이라는 메스를 댄 자본 권력과의 갈등을 그린 드라마인가 싶었다. 드라마는 등장인물을 그렇게 단순하게 그리지 않는다. 대학병원에 새로 취임한 사장이 병원이 묵인해온 의료사고를 파헤치려 하자 의사들은 여기에 맞선다. 악한 줄 알았던 인물이 정의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고, 선한 줄 알았던 인물이 사회 전체의 공공선과 배치되는 가치를 옹호하면서 드라마는 생동감을 획득한다.
북 저널리즘의 책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에 나온 '점멸하는 개인'이 나는 이 드라마 속 군상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개인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자, 전통적 저널리즘에 흡수되지 못한 뉴스 소비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늘날의 대중을 '점멸하는 개인'으로 변화하고, 뉴스 역시 이 개인의 소비 행태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개인은 부당함에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존재인 '시민'인 동시에, 자신의 삶을 영위할 때 필요한 정보를 기사로부터 얻고자 하는 '소비자'다.
이 충돌하는 듯한 두 정체성은 선의를 추구하지만 실은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이익집단의 아집일 수도 있고, 위악을 내세우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비리 폭로일 수도 있는 개인 혹은 집단의 입체성을 보여준다. 특히 개인의 영역에서 사회 정의나 불편부당을 외치지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자신의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하는 모습은 우리가 시민인 동시에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점멸하는 개인의 숙명과도 같다.
오늘날 저널리즘이 받아들여야 하는 뉴스 소비자의 모습도 이런 모습과 관련이 있을 터이다. 책의 저자가 '서비스 저널리즘'이라고 소개한 저널리즘의 한 부류는 뉴스 수용자의 이중성이나 모순성, 다양성을 적극 받아들인다. 뉴스 수용자가 사회의 부조리에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일상을 사는 기술을 터특해야 하는 '생활인'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 점멸하는 개인은 이들은 또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미디어를 확보할 수 있고, 나름의 영향력도 키울 수 있다. 이런 시대에서 저널리즘은 '권력의 감시견' 역할을 수행하는 것만큼이나 생활 정보 등의 연성 콘텐츠를 제공해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렇듯 저널리즘을, 수용자를 다시 정의할 때 저널리즘은 뉴미디어의 홍수와 점멸화하는 개인 속에서 중심을 잡고 먹고사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