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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해지기 위해,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신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by 안녕하세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벽을 느낀 적이 있었다. 내가 아닌 상대방이 깨야 하는 벽이라고 생각했고, 그만큼 관계가 소원해질 때 즈음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신간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게 됐다. 책을 다 읽은 후 내가 느낀 벽은 내가 세운 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타인의 경계에서, 나의 한계를 인정하되 그 한계를 긍정하지는 않으려는 태도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이 책은 신형철이 최근 8여 년 동안 여러 매체에 싣거나 정리해둔 글을 모아 슬픔, 소설, 시, 사회, 문화 등으로 분류해 뒀다. 각각의 챕터는 주제에 맞게 다양한 사회적 현상이나 영화, 책 등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는 '타인에 대한 고통'이라는 주제의식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이 스스로 헤아릴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타인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단지 그 사실에만 머물지 않는 존재가 또 인간이라는 점을 긍정한다.


인간은 왜 타인의 고통에 반응해야 하는가. 나는 이 답이 마지막 챕터의 머리말인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에 소개돼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한 쌍으로 이뤄진, 온전한 두 인간이 신의 질투와 시기를 사 온전하지 않은 각각의 한 명으로 나눠지게 되는 사연이 나온다. 그래서 혼자가 된 인간은 온전해지기 위해 평생 자신의 반쪽을 찾으러 나서게 됐다는 얘기다.


배려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그만큼 타인을 돌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적이 있다. 이런 태도가 '독립적 삶'을 일군다고 믿고 그렇게 살고자 했다. 이 책은 내 생각이 얼마나 허상에 가까웠는지, 그리고 그 허상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는지를 돌이켜보게 했다. 나는 이 책에서 영화, 책,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을 수단 삼아 인간과 인간을 이으려는 따뜻한 의도를 느꼈다. 신형철의 문장이 쉽게 읽히면서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는 이 의도가 큰 몫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래는 각 챕터에서 여러 가지 콘텐츠를 통해 저자가 내린 결론이데, 그 중에 인상 깊었던 구절을 직접 인용했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슬픔의 불균형에 대하여)


-잘은 모르겠지만 근래 대한민국의 풍경을 보면 우리가 어딘가에 자꾸 갇혀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기는 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에 갇힌다.(시의 옷을 입은 비극)


-그러므로 수면은 각성의 반대말이 아니다. 수면은 각성의 근거다. 자야만 깨어날 수 있다. 이 통찰을 절망과 희망이라는 짝에다가 적용해 보려고 한다.(희망은 종신형)


-서로를 몰랐던 때보다는 좀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감히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제 몫의 결여를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런 인간이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


-요컨대 진정한 비판은 적의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부분과 맞서는 일이다. 그럴 때 나의 비판 또한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을 대하는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돼 있다.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적을 사랑하면서 고귀해질 것인가. 적을 조롱하면서 공허해질 것인가. (중략) 전자는 어려워서 드물고 후자는 쉬워서 흔하다.(나의 소중한 적)





글 읽으면서 마음이 정화됐던 건 참 오랜만이다. 신 교수님 비평 오래오래 해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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