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에게 '진상 손님'이었다

싸울때면 밥상에 올랐던 보쌈정식...그 반찬엔 엄마의 죄스러움이

by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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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가 차린 밥상에 앉은 '진상 손님'이었다. 밥숟가락을 쓰게 됐을 때부터 결혼으로 독립하기 전까지 쭉 그랬다. 음식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들어가면 먹지 않고, 음식이 짜면 먹다가 내 방으로 들어갔다. 학교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더욱 심했는데, 엄마가 내 기분을 알기 쉬운 편도 아니었다. 집에서 감정을 내색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 먹고도 철부지였던 나는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것 같다. 한 집에 살면서 딸의 감정 하나 살피지 못하냐고.


생각해보면 나는 크면서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두 살 터울의 오빠에게 천자문 등을 직접 가르칠 만큼 오빠에게 관심을 쏟았고, 부모님은 동네에서 소문난 말썽꾸러기였던 오빠가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내게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나는 얌전한 둘째였다. 엄마가 오빠의 숙제를 도와주는 동안 나는 스스로 다음날 필요한 준비물을 챙기고 알아서 잠들 만큼, 내 일은 알아서 하는 편이었다. 일곱 살 때였나. 분노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은 피아노 학원 선생님에게 볼펜으로 손등을 맞아 시퍼런 멍이 든 적이 있었다. 잘못에 비해 크게 혼났다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을 안고 집에 들어왔는데, 병원에서 교대근무를 마치고 온 엄마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누구에겐가 위로받고 싶었지만 엄마를 깨워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속상한 마음을 홀로 삭이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뾰족해진 내 마음을 뭉툭하게 다듬어주는 것도 엄마의 밥이었다. 재료 맛을 살려 소금이나 참기름에 버무리는 방식이 많았던 엄마의 반찬은 내 입맛에 잘 맞았다. 엄마도 음식에 대한 내 기호를 잘 알고 있었다. 엄마와 크게 싸운 뒤 후회하면서 집에 들어간 날 저녁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살아 있는 보쌈과 윤기 흐르는 밥이 상에 올라와 있었다. 그 밥을 먹은 나는 마음이 한껏 넓어져서,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었는지 후회가 들곤 했다.


영양가만큼 꽉 찬 집밥 만들기의 수고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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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에게 먹이는 이유식. 4~5일 간격으로 재료를 불리고 으깨 냄비에 끓인 뒤 체에 밭친다(왼쪽). 복날에 집에서 남편과 만들어 먹은 삼계탕(오른쪽).


믿음직스러운 한 남자와 가정을 꾸린 후에야 나는 내가 먹는 밥의 주인이 됐다. 처음에는 신이 났다. 내가 원하는 음식을 내가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어서였다. 꼬막이 제철이던 지난해 겨울, 꼬막 비빔밥을 먹고 싶었던 나는 떨이로 파는 꼬막 몇 개를 사 와서 해감을 하고, 다진 마늘과 양파가 들어가는 양념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남편과 양념장에 밥을 비벼 먹고 나니 9시. 주방 청소까지 마무리하고 나니 10시가 다 됐다. 제철 음식을 건강하게 집에서 먹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음식 만드는 과정으로 깨달았다.


육아휴직으로 집에서 쉬면서부터는 집밥을 만드는 일이 가장 큰 일과가 됐다. 빨래, 청소 등은 건조기와 로봇청소기를 돌려 어느 정도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요리는 어쩔 수 없는 내 몫이었다. 나의 하루는 갓난아기에게 이유식과 분유를 챙겨주고, 남는 시간에 나와 남편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상으로 채워졌다. 매일의 음식을 그때의 분위기와 기분에 맞춰 만들 수 있어 만족스러웠지만, 동시에 벅차기도 했다. 사 먹는 음식도 하루 이틀일 뿐, 나의 주된 고민은 매일 마주하는 먹거리였다. 음식을 손질하고 먹은 뒤 치우는 일을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반복하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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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순대. 오징어가 부족해 순대소만 따로 삶았다. 찜기로 쪄내서 맛이 담백하다(왼쪽). '육아 퇴근' 후 냉장고에 남은 목살과 숙주를 구워 남은 소주와 혼자 먹었다(오른쪽).



당신 밥에 묻어있던 죄스러움을 깨닫기까지


엄마는 결혼하기 전부터 간호사였는데, 결혼 후에도 밤샘근무나 야근 등의 일과 살림을 병행했다. 당시는 삼촌이었던 작은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우리 집에서 같이 모시고 살다 나와 오빠를 낳았다고 했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긴박한 일을 하면서도 집에서는 공부하는 삼촌의 도시락을 챙기고, 노쇠한 할아버지의 삼시 세끼를 차리면서 동시에 아빠와 나와 오빠의 끼니를 책임져야 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자신의 마음을 미처 다 쓰지 못해 마음에 걸리는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부리는 밥투정이 서운하면서도, 자신이 미처 신경 쓰지 못했기 때문이리라는 죄책감을 떨쳐내기 어려웠을 테다. 그리고 내 이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같이 윤기 흐르는 밥을 상에 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엄마는 병원에서 이틀을 연달아 쉬게 됐다며 자신의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아기를 재운 뒤 냉장고에 남은 음식으로 오징어 볶음을 만들어 먹고 있을 때였다. 처음 만든 오징어 볶음이 생각보다 맛있어서 엄마에게 물어봤다. "내일 엄마네 집 가면 오징어볶음 만들어 줄까?" 엄마는 이제야 딸이 만드는 음식을 먹어보겠다면서 좋아했다. 엄마의 집에 간 날, 오징어 볶음 재료는 엄마 손 안에서 오징어 된장국이 되어 상에 올랐다. 친정에 오면 마냥 쉬어야지 음식 같은 건 하지 말라면서. 갈치구이와 된장국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나는 다시 엄마가 지은 밥의 손님이 됐다. 다만 이제는 낯 뜨거운 '진상 딱지'를 조금 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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