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극적인 한국 경제의 현실 <블랙머니>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블랙머니>에서 검사 '양민혁(조진웅 분)'과 '김나리(이하늬 분)'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선택을 한다. 자산가치 70조 원의 대한 은행이 헐값에 매각되도록 공조한 세력을 고발하거나 은폐하면 서다.
양민혁에게 금융감독원, 대형 로펌, 해외펀드 및 전현직 공무원이 연루된 대한 은행 매각 사건은 한국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피아'가 힘없는 국민의 혈세로 벌인 투기극이다. 엘리트 직업 중 하나인 검사가 이런 관점으로 사건을 보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고위 관료의 아들에게 교통사고를 당한 그의 아버지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가해자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부재로 정의의 부재를 실감한 뒤 검사가 된 그였기에 가진 자들의 횡포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을 것이다.
반면 김나리에게 대한 은행 사건은 아버지의 자산 절반을 수십 배로 불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해외 펀드와 전현직 경제 관료들의 결탁을 처음부터 눈 감았던 건 아니다. 금융감독원 위원으로서 대한 은행 매각을 징벌적 매각으로 심의하기 위해 심기일전하고 있던 순간, 이 선택이 자신 아버지의 자산 수 조 원을 날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자신의 조국에서 통상 국제 통상 전문 로펌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단순 매각 결정으로 보전한 아버지의 자산으로 로펌을 세우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따른다.
자신의 정체성에 반하는,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양민혁은 김나리가 속해 있던 유수의 대형 로펌 대표에게 러브콜을 받아 승승장구하며 살 수도 있었고, 김나리 역시 대한 은행 매각이 부당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진실을 파해치고자 증거를 수집해 왔다. 그러나 어떤 상황은 자신이 속한 세계가 정당한지의 여부를 고민할 틈도 없이,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결정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결정의 결과는 부메랑처럼 선택을 한 본인에게 돌아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또 다른 선택을 눈 앞에 가져다주게 된다.
영화 속엔 두 세계가 끊임없이 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김나리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가 속하는 세계가 있다. 그들은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정책을 결정해 거대한 이익을 취한다. 다른 한 편엔 이들 때문에 직장을 잃는 등 궁지에 내몰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 은행 매각으로 일자리를 잃고 단식 투쟁하는 조합원들이 대표적이다. 처음엔 이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양민혁과 김나리는,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이 속한 세계가 어떤 곳과 좀 더 닮아있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현실 속 사회는 좀 더 복잡하고도 미묘하지만, 정책 등 한정된 서비스를 독점해 지대를 추구하는 행위가 만연한 사회에선 이 구도가 적절하게 느껴졌다.
성추행 검사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사건에 파고들다 거대한 진실에 직면하는 양민혁 검사는, 실체가 불분명한 대의명분보다 자신과 관련된 사소한 계기로 움직이는 인간의 본성을 잘 그려냈다. 부당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지만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 결국 이익을 택하는 김나리 변호사도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인물이다. 이들의 선택을 따라가면서 마주치는 불편한 진실이 씁쓸하지만,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감정이다. 2011년 외환은행 매각 지연을 이유로 론스타에 피소된 한국은 내년에 5조 원가량을 물어줘야 한다. 고소의 근거 조항인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의 국가 패소율은 99%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