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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고 싶거나 버리고 싶은) #습관 #버릇
그는 그녀의 손에 칼을 쥐어주며, 속삭였다. 상대를 찌를래, 너를 찌를래. 앞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선택해야하는구나.
그는 참 나쁜 버릇이었다. 수십 년에 걸쳐 가장 가까이서 그를 봐왔기에 말하건대, 그늘진 냄새가 있는 버릇이었다. 어둡고 음습한 냄새는 주변에 조용히 퍼져 그녀의 사람을 갉아먹었다. 여럿이 그녀를 떠났다가, 이내 돌아왔다가 다시 떠났다. 소중한 이 몇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넸다. 그를 고쳐보면 어때? 사실 버리는 게 가장 좋을 수도 있어.
그녀가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쌓아온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주는 상처로부터 가장 먼저 달아날 수 있었고, 암담한 현실 앞에서 조용히 도망칠 수 있었다. 가끔은 그녀를 알아주는 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반면 방향을 정한 양날의 검은 반드시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상처가 많아질수록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를 두둔했다. 그래도 이 상처가 더 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녀는 반복적으로 그를 찾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내가 못나서 그래. 역시 내 탓이야.' 그는 기꺼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의 눈을 가리고, 귀를 닫고, 마음을 움켜쥐어 그의 세상속에 살게 했다. 조금씩 그녀의 세상이 안에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다.
물론 좋은 일도 있었다. 잘못'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한 것들이 여러 형태로 그녀에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책임감의 모습을 할 때도 있었고,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한 사과가 되기도 했다. 자신에게 휘두른 칼이 다른 이를 지키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꽤 오랫동안 그녀는 가려진 시간 속에 있었다.
그녀는 그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버리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그는 그녀였으니까. 가장 먼저 한 것은 의식적으로 그를 피하는 일이었다. 무심코 튀어나오는 그를, 불쑥 불쑥 토해내는 그를 꾹꾹 눌러 깊은 곳에 묶어놨다. 인식하자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어떤 것도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두번째로, 모두에게 상처주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내 잘못도 아냐, 네 잘못도 아냐. 그냥 오늘 날씨가 흐려서 그래. 내 잘못도 아냐, 네 잘못도 아냐. 그냥 배가 고파서 그런가. 그리하여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고여있던 물웅덩이 속의 감정이 찰박, 세상밖으로 튀어나와 물줄기를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씩 용기를 냈다. 그의 힘을 믿었던 만큼, 반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노력은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즐겁다 말하니 즐거워졌고, 행복하다 말하니 행복해졌다. 내가 귀하다 말하니,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팔다리는 풀린 지 오래였다. 꽁꽁 묶여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는 여전히 그녀의 주위를 활개쳤다. 그녀가 행복할수록, 즐거울수록 그는 더 더 더 크게 덩치를 부풀려 그녀를 위협했다. 많이 행복할수록 결국 많이 불행한 법이야. 높이 올라갈수록 더 빨리 추락하는 법이야.
그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나로 인해 네가 혼자가 되었구나. 그 모든 것을 네 탓으로 돌려 너를 홀로 두었구나. 그를 안아줬다. 나를 안아줬다. 괜찮아. 탓해도 돼, 욕해도 돼, 자책해도 돼, 포기해도 돼, 무너져도 돼, 쓰러져도 돼, 우울해도 돼, 부정적이어도 돼.
그래, 세상의 모든 그늘이 널 향한다 해도 괜찮다. 다 괜찮다.
가끔 그런 밤이 있다. 불쑥불쑥 그가 찾아오는 밤, 스스로를 갉아먹는 말들로 나를 괴롭히는 밤.
눈이 내려서 그래.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며 마치 내 존재도 지워진 것 같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내탓을 하게 되지.
그때 그러지 말걸 그랬나, 내가 그말을 해서 이렇게 된건가, 내가 왜 그랬을까.
부던히도 버리고 싶어 노력하지만, 결국 인정하고야 만다.
그래, 이럴 때도 있는 법이지.
탓해도 돼, 욕해도 돼, 자책해도 돼, 포기해도 돼, 무너져도 돼, 쓰러져도 돼, 우울해도 돼, 부정적이어도 돼.
그냥 그런 날도 있는거야.
하지만 역시나 가장 버리고 싶은 말버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