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글 네번째
- 자유 주제로 문장쓰기 (최소 한 문장)
'자유'란 참 어려운 단어다. 마치 딱 한 장 뿐인 흰 도화지 위에 대작(?)을 그리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중요한 계약서에 싸인을 하는데 그 계약서에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은 것처럼. 전자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후자는 책임에 관한 것이려나. 어쨌든 맥락은 비슷하니까.
어릴 때는 막연하게 그 단어를 품고 꿈꿨다. 부모님의 구속에서 자유롭고 싶어! 학교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어! 회사를 뛰쳐나가 자유롭고 싶어!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이라는 노래도 있고..ㅋㅋ) 그런데 자유로운 어른이 된 지금은, 그것이 무척이나 두렵다. 그 뒤를 붙잡고 매달려오는 여러가지 것들이 눈에 너무 보여서 쉽사리 원할 수 없게 된다. 그 어느 것도 나에게서 자유를 앗아가지 않는 요즘은 특히 그렇다. 누군가 내게 숙제를 내줬으면 좋겠고, 엄마아빠의 걱정 어린 보호가 그립고. (그래서 1일 1글을 하는 것일지도)
자유롭게 글을 쓰라니 뭘 쓰면 좋을까. 하루종일 머리속을 맴돌았다. 조금 이따 써야지, 하면서 뭘 써야할지 딱 와닿는 것이 없고. 주입식 교육의 문제일까. 정답이 없기 때문에 자꾸 정답을 찾게 된다. 정답이 없는 문제가 더 정답을 찾게 만든다니 참 아이러니 해.
각설하고, 눈이 온 어제를 쓰기로 했다. 일기야 일기.
밤 사이 눈이 많이 내렸다. 전국을 뒤덮는 하얀 풍경에 모두가 난리난리. 기뻐서 밖으로 뛰쳐나가 눈사람을 만든 이가 있는가 하면, 퇴근길 20분 거리를 3시간 동안 차에 갇혀있었다며 짜증을 내는 친구도 있었다. 고작 눈이 온 것 뿐인데 (물론 많이 왔지만) 많은 이들에게 참 다양한 하루를 만들어줬다. 하지만 집에만 머물렀던 나에게는 큰 영향이 없었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쌓이는 모습을 보고, 하얗게 된 세상을 보고. 그저 지켜볼 뿐.
그러다 모두가 잠든 밤, 꽁꽁 싸매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 눈을 밟았다. 뽀드득 뽀드득 신발이 밟는 곳마다 들리는 소리에 제설작업을 해둔 곳을 벗어나 여러번 눈을 밟았다. 참 신기하게도 이 소리는 어느 때고 설렘을 준다. 어른도 아이가 되는 마법주문.
한바퀴 동네를 걷는데, 마스크를 낀 탓에 자꾸만 안경에 김이 서렸다. 마스크를 코 밑으로 내릴 수도 없고, 안경을 벗어야하나 고민하다 그냥 쓰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아는 길인데 뭐 어때. 그냥 감에 의지해서 걸어가자. 그렇게 뿌연 시야를 만끽하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모퉁이를 돌아 가로등이 가득한 길로 들어서는 순간,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가로등 불빛에 무지개가 내려앉아있었다. 어떤 과학적인 원리인지는 모르겠는데 평소에는 그저 하얗게 쪼개져 보이던 가로등 불빛에 동그랗게 무지개가 하나씩 피어났다. 눈 앞에 하나, 고개를 돌리면 또 하나, 그러다 넓은 길로 들어선 순간 그 골목 자체에 무지개가 피어났다. 마치 가로등에 무지개가 걸려있는 것처럼.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마법이었다. 신나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 때마다 골목골목에서 무지개가 켜졌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풍경, 오직 나만이 누리는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괜히 혼자 뿌듯했다. 난 지금 말도 안되는 걸 보고 있어!
마스크를 쓰지 않았더라면, 안경을 벗었더라면, 춥지 않았더라면, 내가 밖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는 풍경이었겠지.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물려 골목길에 무지개가 피어났다. (근데 대체 무슨 원리지. 뭐랄까 프리즘을 보는 기분이었음)
고요함 속에서 혼자 가라앉다가, 아무도 모르게 행복한 순간을 맞았다. 하루 중 가장 고독했던 순간에 찾아온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 오늘 또 한 번 해볼까 하다가, 시도하지 않았다. 그 풍경을 추억에 남기고 싶었던 건지, 그때의 기분을 간직하고 싶은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작 가로등 불빛이 무지개로 바뀐 것 뿐인데 그날이 특별해졌다. 눈이 많이 내렸던 2021년의 1월 어느 날, 모두에게는 그렇게 기억되겠지만 나만은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아주 작은 것에도 오늘이 특별해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기억할까,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할까. 뿌옇게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서 무지개가 피어났다. 언젠가 삶에 안개가 자욱해도, 눈앞에 어둠이 내려앉아도, 괜찮을 것이다. 걷다보면, 살다보면 분명 무지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