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숙제가 끝났지만, 홀로 하는 숙제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이 그 첫번째 날. 열다섯번째이지만 시작이기도 해.
근데 오늘은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월요병 인 것 같다고 스스로 답하긴 했지만 그건 아닌 것도 같아요. 춥고 눈 쌓인 날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이 바삐 오늘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봐서일까요. 나는 더 이상 가지 않는 시계처럼 방 안에 혼자 있어서일까요.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사실 그것도 아닙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저 기분이 가라앉고 또 가라앉고. 숨을 꾹 참고 수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죠.
그래서 설거지를 했다. 더이상 안되겠다 싶어, 이럴 때는 단순 노동이지 하며 여기저기서 손길을 기다리는 그릇들을 긁어 모았어요. 몇 개 없더라고요. 하지만 아주 뽀득뽀득 정성을 다해 씻었답니다. 덕분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죠. 아, 1일 1글 열다섯번째이자 첫번째의 시작은 이렇게 말하면 좋겠다. 이런 주제로 쓰고.. 아 저런 이야기로도 쓰고 싶은데, 뭐 둘 다 쓰지. 근데 이거 메모 안해놔도 괜찮으려나. 까먹으면 어떡하지. 설마, 꿈도 아니고 생생히 깨어있을 때 생각한 거니까 분명 이따 기억할거야. 네, 기억하지 못합니다. 결국 메모가 답이었습니다.
분명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먼지처럼 공중 속에 흩날려버렸다. 난 바보야, 또 자책하며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 꼬로록.
오늘은 꼭, 소설을 이어서 써보자. 시작해보자. 다짐했건만, 또 실패하고 말았다. 그냥 아무 것도 하기 싫어. 하루쯤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날이 있어도 되잖아. 혼자 중얼거리며 누웠다가, 뒤집어 누웠다가, 다시 누웠다가, 그러다 선잠 들어 악몽을 꾸다가, 그림을 그리다가,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았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조금 더디게 다가갈 뿐. 상처받기 싫고, 칭찬 받고 싶어서, 잘 쓰고 싶고,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바보가 여기 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날이 아니라 숨을 고르고 있는 나날이라고 바꿔 말해볼게. 네가 무언가를 해낸다면 분명 지난한 이 시간들에게는 그 이름표가 붙을거야. 그러니 부디 힘을 내주렴
아,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오늘 무엇을 쓰고 싶었는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목록표를 만들어두면, 하고 싶은 게 훨씬 많아질거라 생각했어. 할 수 있는 것도.
그 주제는 내일로 토스하자 #지금할수있는일 #지금하고싶은일
또 생각났다. 설거지에게 고마워했었어.
왜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거나, 집안 청소 옷장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해가 갔다. 마치 내 머리속이 설거지 되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바로 메모를 안했는지도..) 빨래 끝! 설거지 끝!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구나.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나, 설거지 끝! 생각 끝! 고민 끝! (물론 다 끝은 아니지만) 나 이제 괜찮아. 오늘은 잘 이겨냈어!
설거지하듯, 청소하듯, 내 머리속과 마음속도 정리할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치우고, 버리고. 그리고 나서는 정리정돈을 잘 해둘거야. 찾고 싶은 것을 바로 찾을 수 있게, 언제라도 이불 깔고 드러누울 수 있게.
누군가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다면, 조용히 락스라도 갖다줘야지.
아, 더 쓰고 싶은데 너무 졸리다. 자야지. 그래도 열다섯번째 시작! 첫번째 끝!
앗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 그렇구나 소설의 소재를 생각했구나.
목록표와 같은 것인데,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여자의 이야기야.
나 설거지하면서 왤케 많은 생각을 했대.
하루에 하나 체크리스트를 쓰는 거야
공부, 다이어트, 일정, 일과 이런 목표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용기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싫어요 라고 말하기'에 체크 같은.
쓴 것은 반드시 입으로 말해야하는. 고백도 가능하고. 생각나는대로 추가하자.
아 이것만이 아니었는데. 역시 글은 생각날 때 써야한다
설거지를 하더라도, 청소기를 돌리더라도, 별 그지 같은 일이 있어도
당장, 책상 앞으로 뛰어와서 컴퓨터를 켜!
그것도 안되면 펜이라도 들고 안되면 음성녹음이라도 해!!
네, 결국 메모가 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