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색도 향기도 없이 지나간 날들이여 안녕

책 한 권과 다큐 한 편 <남은 생의 첫날> 그리고 <인생은 백살부터>

by bojoge

매일 매일 즐겁지도 않은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애정, 삶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애정과 에너지의 양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일정량의 애정과 에너지를 항상 가지고 있고, 필요한 순간에 많은 양을 쏟아낼 수 있다면 매우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예상치 못했던 큰 어려움이 닥치면 에너지는 '살아남기' 위한 체제에 전량 투입된다. 이 경우는 논외다.)


나는 애정과 에너지의 업&다운이 매우 큰 편이다. 확 끓어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전형적인 냄비형이다. 그래도 한 번씩 끓어오를 수 있다면 괜찮다. 문제는 완전히 식은 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때다. 차갑게 식은 날들이 겹겹이 쌓이다보면 삶은 어느새 무색무취의 덩어리가 되어버리고, 이 덩어리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르다보면 유일하게 남는 건 숫자로써의 나이 뿐이다. 어느새 서른, 서른 한 살!


완전히 식지 않게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끌어모으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건 역시나 책이나 영화를 보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사람은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편차가 심하지만, 대부분의 책이나 영화는 심장의 온도를 1도 이상 올려준다. (최근에 본 영화 <나, 다니엘블레이크>는 5도!) 하지만 이 마저도 '소비'하는데서 그치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소화'한 후에 뭔가를 내안에서 새롭게 만들어내면, 만들어진 그것이 맘 속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열을 발산한다. 하지만 아무리 재료가 있다한들 뭔가를 새로 만들려면 여기에 또 '에너지'가 필요해서, 대부분 '소비'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를 모으려면 크든 작든 '용기'라는게 필요하다. '더 이상 그립지 않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용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에 도전할 용기, 나를 믿고 자신을 지킬 용기. 용기를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쉽다면 '용기'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착 달라붙은 익숙함과 두려움이 맘속에서 곰팡이처럼 피어나고, 기름때처럼 낀 게으름은 좀처럼 벗겨내기가 힘들다. 이에 질세라 세상이 온갖 기준-이른바 세상의 '평균치'-을 들이대며 겁을 준다. 한국 사회는 결코 용기를 복돋아주는 곳은 아니다. 자라면서는 '모난 돌이 되지 말라'는 훈계에 더 익숙했고, 자라고 나니 '용기내든 말든 자유지만 실패하면 다 네 책임'이라는 식의 매정함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낼 수 있는 순간은 저마다 다른 이유와 모습으로 찾아온다. <남은 생의 첫날>의 주인공 안느에게 용기의 순간은 가족의 응원을 통해 찾아왔다. 불행한 결혼 생활, 무심하고 이기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 행복해지라는 딸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안느는 평생 '인형의 집'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백 살부터>의 다그너에게 용기의 순간은 절박함으로 인해 찾아왔다. 이대로 알콜 중독자 남편 곁에 있으면 안되겠다는 순수한 절박함. 일단 용기를 한 번 내기 시작하면 모두에게 공평하게 '변화'라는 것이 찾아온다. (<남은 생의 첫날>은 소설이니 그렇다 치고, <인생은 백 살부터>의 다그너 할머니가 결심하고 알콜 중독자 남편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다정한 남편 해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102세에 새로운 애인과 데이트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작은 변화가 쌓이면 단단하게 둘러싸고 있던 껍데기에 금이 생기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알을 깨고 새로운 것이 나온다. 그 새로운 것을 '진짜 나',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 혹은 다른 어떤 것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의미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살면서 아직 큰 용기를 내야하는 순간을 만나지 못했다. 일정량의 에너지만으로도 무탈하게 잘 살아 온 듯 하다. '무색무취의 덩어리'같은 삶과, 매순간 충실하고 새로운 삶 중간 어디쯤에 적당히 잘 위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어딘가에는 '알을 깨는 경험'에 대한 갈망이 항상 있다. 아직 어떤 용기를 내야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냥 잠을 잘수도 있었는데 굳이 노트북을 켜고 이 글을 쓰는 것도 나에겐 작은 용기인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매순간 작은 용기를 내고, 조금씩 변화를 맞이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큰 용기를 결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매일 즐겁진 않더라도, 색이 있고 향기가 있고 의미가 있는 날들을 쌓고 싶다.


덧글.


독서모임 <트레바리>http://trevari.co.kr 에서 책 한권 다큐멘터리 한 편을 패키지로 읽고 보는 <북큐멘터리> 클럽 파트너로 활동중입니다. <북큐멘터리> 3월 모임에서 읽은 책과 다큐멘터리를 소개합니다.


책, <남은 생의 첫날>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546384

다큐, <인생은 백 살부터>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3207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