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만난 연기(緣起)
백지 위에 만화를 끊임없이 그려나가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책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들을,
그리고 또 그리면서 말풍선을 채워나간다.
그림을 그릴 때 녀석은 무척이나 신나있다.
말풍선의 말을 따라하기도 하고,
장면을 해설하기도 하면서 자기가 쓴 내용을 신나게 해설하고 웃고 또 웃는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올라오는지, 온전히 듣고 있느라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자유시간, 쉬는시간에는 정말 멋지고 신나는 일이었는데
'수업시간'이라는 맥락이 되면, 녀석의 행동은 '문제행동'으로 바뀌어버린다.
녀석이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바깥에서 울려퍼지는 교사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고
친구들의 이야기에도 시큰둥하니까.
자기 내면에서 하고 싶은 과제를 밀쳐놓고 '해내야만 하는 과제'에 몰입하는 일도
'사회생활'에 필요한거지..
배워야만 하는거지. 싶지만...
내면에서 올라오는 움직임, 욕구, 동기, 의도, 감정과는 무관하게
그냥 '외부에서 요구되는 것'을 해 내는 걸 하기 위해
자기 내면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처리하는 것도 배워야 하는거지.. 싶지만
...
고민이 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개인의 자율성, 독특성, 고유성과 전혀 무관한
'대량생산'이 목적이었던 학교 교육 시스템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AI가 창의성을 담당한다는 이 시대에,
40분 정해진 수업을 하고, 10분 쉬고, 또 다른 과목으로 옮겨타야만 하는 시스템 속에서
지금 이 시간에, '누가' 공부를 하고 있는걸까?
나는 자주, 정말 자주 묻는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고 싶어서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걸까?
깊이 생각하다보면 머리가 아프고 속이 시끄러우니
적당히 넘어가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도 내 속이 너무 말랑거린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
ㅡ 각묵스님 옮김(2009a), 『상윳따 니까야 1』,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p.168
부처님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가르침인 연기(緣起)는
어떤 대상에 그 속성이 정해져있지 않다는 거다.
고정된 무언가, 라는 건 없다는 거다.
'문제있는 아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문제있어 보이는 아이'는
그 환경과, 그렇게 보는 사람의 시선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무지(無智)한 시선'이거나
'그렇게 보고 싶은 (알든 모르든 어떤 목적이 있는) 시선'에 의해
그 아이는 '문제있는 녀석'으로 규정된다.
다시. 그 녀석은, 어떤 녀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