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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철 Jan 13. 2019

<브라질 팔도유람>  
03.1 리오 데 자네이루

1월의 강 혹은 앙리 빌

1월의 강 혹은 앙리 빌


바이아 땅을 처음으로 도착한 가스파르 지 레모스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다. 그들의 선단은 바이아를 지나 점점 남하면서 브라질에 관한 탐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리우데자네이루의 과나바라 만 지역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그 거대한 바이아만을 봐서 그랬는지 과나바라만은 강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이 거대한 브라질 땅이 걸리버 여행기의 대인국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때가 1502년, 1월 1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의 이름을 1월의 강이란 뜻인 리우 데 자네이루라고 지었다.

가스파르 지 레모스는 그 뒤에도 계속 브라질의 이곳저곳을 탐사했다. 그리고 탐사의 결과물을 가지고 포르투갈로 귀환했다. 그들이 가져간 것은 몇 가지 과일과 식물 그리고 처음 보는 진기한 동물 등이었다. 그 속에는 포르투갈에서 고대했던 금이나 은, 귀금속 혹은 향신료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것은 인도에서 귀환했던 배들의 전리품에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동행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브라질을 탐사하면서 이곳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지구 상의 낙원이 있다면 이 근처일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이 낙원에 가까운 이 땅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포르투갈에서는 파라다이스보다는 엘도라도를 원했다. 그것은 모든 유럽이 그러했다. 

하기야 사람들에게 이주의 자유가 있다면 파라다이스란 나라와 유토피아란 나라 그리고 엘도라도란 나라가 중에 엘도라도의 인구가 월등히 많을 것이다. 

당시에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항해에 관한 기술은 뛰어났을지언정 여전히 강하거나 재력이 넘치는 국가 즉 강대국은 아니었다. 그들은 엘도라도의 가능성이 없는 것 같은 브라질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브라질은 조금 더 오래 낙원에서 가까운 곳이 되었다.


브라질 나무가 유럽에 소개된 이후 이 낙원에 가까운 땅에는 많이는 아니더라도 점점 다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이 오게 되었다.

그들은 브라질 나무를 베러 오거나 혹은 해적이던가 새로운 땅의 환상을 가진 자들이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개척하거나 식민화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니콜라스 뒤랑 빌르게뇽 이라는 프랑스 사람은 매우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적인 석학의 풍모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해적에 가까운 모습을 가지기도 했다. 전장에서는 용맹스러운 군인의 모습이었고 삶에서는 예술 애호가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비극적이고 사연이 많은 여인, 프랑스 왕비였다가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된 메리 스튜어트를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데려간 인물이다.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자유로운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대담하고 모험으로써의 낭만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한 군데 오랫동안 평온하게 있다는 것을 답답해했는지 모른다.

그는 돌연히 자비를 들여 100여 명의 사람을 모아서 새로운 땅으로 떠났다. 그곳은 낙원에 가까운 땅이라는 브라질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낙원보다는 왕국을 건설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브라질에 도착한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섬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이름을 콜리니라고 지었다. 콜리니는 위그노 해군 제독이었다. (위그노 Huguenot, 위그노는 프랑스에서 개신교를 의미하는 말이다. 기독교에서 로마가톨릭과 칼뱅 이후의 개신교 대립과 박해는 계속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 전쟁이 바로 위그노 전쟁이다. 콜리니는 유명한 해군 제독이었는데 그는 위그노였다.)  그는 콜리니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 섬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빌리게뇽이 위그노였는지 가톨릭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위그노에게는 그는 가톨릭이고, 가톨릭에서는 그가 위그노라고 비난을 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포용적인 인물이었거나 혹은 어느 한 편에서 구속받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그는 그 콜리니 섬을 떠나서 내륙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왕국을 만들려는 그곳의 이름을 우리나라의 다세대 주택의 이름 같은 앙리빌이라고 지었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왕 앙리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곳으로 또 다른 위그노들이 박해를 피해서 프랑스에서 들어왔다. 새로운 브라질 땅에서 -프랑스인들은 노예사냥을 금지했었기 때문에- 인디오와 가톨릭교도, 위그노들이 한 곳에서 공존했다. 사실 평화롭게 살았는지 아니면 서로가 문제의 문제를 일으키면서 싸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포르투갈에서는 자신의 영토 브라질에, 그곳도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리우 데 자네이루에 프랑스 사람에 의한 왕국이 건설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소탕을 위한 몇 차례 싸움이 있었지만, 이 앙리 빌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다. 

결국, 포르투갈에서 이스따시우 지 사가 파견된다. 그는 리우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설탕산 혹은 빵산이 불리는 빵 지 아수까에 캠프를 설치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느린 전투라 할 수 있는 것이 시작되었다.

앙리빌의 본산은 글로리아에 있었다. 글로리아와 빵산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불과 3km 정도 되는 거리다. 산책하러 가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그런데 이 거리로 공격을 수행하는 데 22개월이 걸렸다. 그렇다고 이 전투가 몇천 명, 몇만 명이 움직여야 하는 대규모 전투도 아니었다. 

나무늘보 같은 22개월이 걸친 행군 후에 몇 시간의 소규모 전투 끝으로 프랑스의 앙리빌은 끝이 났다. 이삼십 명의 사람의 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 소규모 전투에서 이스타시우는 승리를 얻었지만, 화살을 맞아서 사망했다. 이 전투로 앙리빌은 사라지고 비로소 리우 데 자네이루가 시작되었다. 이스타시우는 그의 죽음으로 리우데자네이루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는 식민지 브라질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예수상에서 바라본, 정확하게 에수님의 시선으로 바라 본 리오 데 자네이루, 가운데 툭 뛰어난 바위산이 빵지 아쑤까>

도시는 천천히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금의 발견이 되고 수도가 사우바도르에서 리우 데 자네이루로 옮겨진 이후 당연히 브라질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골드러시 시대가 끝이 나고 리우 데 자네이루가 비약적이고 특별하게 탈바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브라질의 운명 그리고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나폴레옹 전쟁이다. 그리고 포르투갈 왕정의 딜레마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모든 유럽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마침내 영국과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을 쳐들어가기 위해서는 포르투갈을 지나쳐야 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영국으로 가는 길과 항구를 내어달라고 포르투갈에 요청했다. 영국 또한 프랑스를 봉쇄하기 위해서 포르투갈이 필요했다.

포르투갈은 확실하게 영국이든 프랑스이든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영국을 선택한다면 프랑스는 침략할 것이고 기세 등등한 나폴레옹을 당해낼 자신은 없었다. 프랑스를 선택한다면 영국은 포르투갈의 앞바다를 봉쇄할 것이다. 그럼 자연히 브라질로 갈 수도 없고 그곳을 잃게 될 것이다. 

바다의 영국과 대륙의 프랑스, 이 선택으로 포르투갈의 미래가 달려있었다.

그것은 유럽 대륙으로 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바다로 향한 새로운 땅, 브라질이 더욱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일 수도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 왕인 주앙 6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와 같은 신세였다.

당시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원자재를 공급하는 땅에 불과했다. 주앙 6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브라질이란 곳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에 최후의 통첩을 보낸다. 주앙 6세는 장고의 장고를 거듭한 가운데, 프랑스의 통첩을 거부하고 영국을 선택했다. 그리고 포르투갈을 떠나 브라질을 선택했다. 포르투갈 왕실인 브라간사 집안은 영국 함대의 호위를 받으면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떠나서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로 떠났다. 그때가 1807년이었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이 식민지가 된 이후 300년이 넘도록 포르투갈 황제를 비롯한 왕실의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브라질을 가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 땅을 밟은 것이다. 당시 브라질로 온 인원은 약 1만 5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왕가뿐 아니라 모든 귀족, 성직자, 통치자, 사제, 군인들, 그뿐만 아니라 왕가의 재원도 거의 다 가지고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이제는 포르투갈 황제가 브라질의 황제가 된 것이다. 더는 브라질이 종속적인 포르투갈 식민지가 아니었다. 

이제 브라질은 포르투갈 왕실이 있는 본국이 되었고 리우데자네이루는 왕실이 있는 수도가 되었다. 이 리우데자네이루는 왕실의 수도에 걸맞은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했다.

그 뒤 모든 것은 급격하게 변화가 이루어졌다.

규제가 철폐되고, 중앙은행이 설립되었으며, 관계 부처가 조직이 되고 왕립출판소도 생겼다. 처음으로 신문이 만들어졌으며 다양한 제도가 정비되었으면 학술원, 박물관 등이 생겼다. 그리고 이 왕실을 브라질을 포르투갈과 알가르베 연합왕국이란 이름으로 격상시켰다. 이제 브라질은 명실상부하게 포르투갈과 대등한 연합왕국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브라질은 리우 데 자네이루를 중심으로 한층 발전해 나갔다. 

이 사건은 브라질의 많은 것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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