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 뭐니 해도 브라질은 축구와 삼바의 나라이니까 축구와 삼바의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카니발이 한창이던 어느 날, 삼바 학교 살게이루의 가수 '낑유'는 텔레비전 인터뷰에 출연해 특유의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사람들을 고양시키고 있었다. 빨간색과 하얀색의 삼바 학교 살게이루의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가 갑자기 셔츠를 들어 올렸다. 그가 들어 올린 빨간색과 하얀색의 셔츠 안으로 가슴에 선명한 별이 박힌 검은색의 유니폼이 드러났다. 그는 삼바 학교 살게이루 셔츠 안에 축구팀 보타포구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혹은 마음 깊숙이 사랑하는 축구팀 혹은 축구 클럽을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사람들은 거기에다 자신들의 삼바 학교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만일 리우데자네이루 거리를 걷고 있다면 자신이 응원하는 축구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거리 곳곳에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카니발 시즌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온통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참여하고 있는 삼바 학교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유명가수나 유명인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팀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마스 끼 나다'로 유명한 브라질 명곡 제조기 '조지 벵 조'의 노래 가사에서는 툭하면 그가 사랑하는 축구팀 플라멩구가 등장한다. 내숭은 없다. 우리나라의 손석희 같은 이미지의 아나운서조차 자신의 축구팀의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마음속의 피부와 같다. 그들은 그 피부를 드러내듯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우리나라의 축구팀들은 FC 서울, FC 성남 뭐 이런 식으로 그 팀이 위치하는 도시나 지역의 이름을, 혹은 축구팀울 소유하고 있는 기업의 이름을 따온다. 브라질의 많은 축구팀들도 자신의 지역이나 도시 등의 연고를 바탕으로 축구 클럽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지역이나 연고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단지 축구 그 자체를 위한 축구 클럽의 이름도 많이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도시 하나에만 해도 수많은 축구팀이 있는데, 그중 유명한 팀으로 플라멩구, 보타포구, 플로미넨시, 바스코 다 가마 등을 꼽을 수 있다. 앞의 세 팀의 이름은 신촌 축구 클럽, 유나이티드 신사, FC 노량진 뭐 이런 식으로 동네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하지만 바스쿠 다가마란 축구팀은 좀 다른 경우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자 불세출의 브라질 축구팀의 영웅, 지금은 브라질 사회당 상원의원인 호마리우가 간판스타로 활약했던 바스쿠 다가마(물론 호마리우는 플라멩구에서 뛰기도 했기 때문에 플라멩구 응원자들은 호마리우가 플라멩구의 스타라고 이야기하겠지만)는 포르투갈의 항해자이자 영웅인 바스쿠 다가마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왜냐하면, 이 축구팀은 100년보다 훨씬 이전에 포르투갈의 이민자들을 주축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항해 시절 포르투갈 범선 ‘카라벨랴’에 새겨졌던 붉은색 십자가, 또는 그 십자가가 큰 돛에 새겨진 범선 이미지를 클럽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바스쿠 다가마는 15세기 말, 포르투갈에서 출발해서 대서양을 타고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었다. 아직 정확하게 지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던 시절, 막연히 대양 저 너머에서 다른 신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있는 포르투갈은 당시 100만 명이 채 안 되는 인구의 소국이었지만, 대서양이 앞마당처럼 위치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대양의 탐험을 더 활발하게 시작하였다.
1497년 4척의 배와 170명의 선원으로 출항한 바스쿠 다가마는 아프리카로 남하해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한 후,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많은 습격과 전투, 처음 겪은 몬순 기후, 선원들의 괴혈병 등 온갖 죽을 고생을 넘기는 바람에 그가 돌아왔을때에는 이미 절반이 넘는 선원이 죽었고, 배는 2척만 남았다. 하지만 그가 귀환했을 때 포르투갈은 커다란 흥분에 휩싸였다. 드디어 인도로 가는 항로가 개척된 것이다.
그는 동(Dom)이란 작위를 받았고 그의 자식과 후손들도 계속해서 이 작위를 세습받게 되었다.
그리고 인도는 이후 계속해서 유럽 강국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하는 슬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인도양의 제독이란 호칭을 얻은 바스쿠 다가마는 결국 또 다른 인도 항해 때 인도의 마야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하면서 포르투갈은 해상 제국의 선봉으로 서게 되었고 국가적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그 뒤 얼마 후 1500년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은 처음으로 브라질에 도착했는데, 그것은 인도로 가는 도중이었다.
바스쿠 다가마는 왜 인도로 가려고 했을까? 포르투갈은 왜 그렇게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려 했을까?
이유는 한 가지, 바로 후추와 향신료이다. 지금이야 슈퍼마켓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너무나 흔해서 향신료란 말이 왠지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후추지만 아주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후추는 귀족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중요하고 귀중한 향신료였다. 문제는 사람들에 후추에 대한 큰 사랑만큼이나 후추가 많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이 사랑의 크기 혹은 욕망의 크기에 급수적으로 가치는 올라갔다.
오늘날처럼 농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육식이 주요한 식량이었다. 문제는 고기는 유통기간이 짧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 냉장고가 있을 리 만무했고, 특히 더운 날, 고기를 보관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주로 소금을 뿌려서 보관하곤 했지만 고기의 맛은 쉽게 변했다. 그런데 이 후추라는 향신료를 뿌리니 그 변한 고기 맛이 감쪽같이 감춰지는 것이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유럽 사람에게 후추는 소금과 함께 아주 중요한 향신료가 되었다. 솔트 앤 페퍼의 환상 조합이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 향신료가 인도에서만 난다는 점이 문제였다.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유럽에서 인도에서 후추를 사 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지중해를 지나고, 다시 육로로 아랍의 사막을 지나가야 했다. 당시 지중해의 해상무역은 베네치아(지금의 이탈리아)가 꽉 잡고 있어서,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서 많은 세금이나 수수료를 지급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서쪽 육로로 가기 위해서는 많은 이슬람 국가들을 지나야 했는데, 유럽과 이슬람은 항상 위험한 관계였기 때문에 이 또한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고, 그에 따른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후추의 가격은 이슬람 국가를 지나고 지중해를 지나면서 폭등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후추를 사랑했다. 구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가치는 더욱더 치솟았다. 또한, 이를 대체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후추에 대한 열망은 더욱더 강해졌다.
바스쿠 다가마는 처음으로 육로를 통하지 오직 바다를 통해서 인도를 다녀왔다. 인도로 가는 해양항로를 개척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절반의 배가 난파되고 절반의 선원이 죽는 값 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 값 비싼 대가는 그가 귀환하면서 가져온 약간의 후추였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의 귀환에 열광하고 그가 영웅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게 많은 고생과 희생을 통해서 가져온 약간의 후추는 당시에 지중해와 아랍의 육로를 통해서 가져온 후추보다 50배가 넘는 이윤을 남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영토를 정복하고 확장하는 것뿐 아니라, 교역과 상업을 선점하고 이를 통해 부를 창출하는 것이 곧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국가는 부를 쌓는 것이 곧 강대국이 되는 것, 왕권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국가 산업의 해외 확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많은 야심가는 바다 넘어 어딘가에 그들에게 부와 권력을 찾아 떠나는 꿈을 꾸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그런 분위기가 넘쳐났다.
포르투갈은 서유럽의 서쪽 끝에 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있다. 수도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서쪽에 있고 대서양이 환하게 펼쳐있다. 포르투칼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우리나라와 거의 일직 선상으로 서쪽 끝에 있다. (면적도 거의 비슷하다.)
세상의 끝일 것 같은 망망한 대서양은 포르투갈의 앞마당이 되었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대서양과 함께 하는 바다 이야기와 바다 사람의 이야기가 넘쳐났다.
포르투갈은 육지에서는 강한 존재가 아니었지만, 바다에서는 강인한 이름을 남겼다.
이런 이름의 선구자는 그야말로 바다의 왕자라고 할 만한 엔히키 왕자이다. 그는 바다로 끊임없이 진출했고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했다.
그는 무엇보다 대서양이란 바다를 연구하기 위한 사그리스 해양학교를 설립했고 이는 마치 지금의 ‘나사’와 같은 존재였다.
인간이 망망대해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많은 연구와 준비, 그리고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고 해양학교는 이런 것을 위한 전진 기지와 같은 곳이었다.
또한, 혁신적인 기술의 범선 까라벨라(영어로는 캐러벨)가 탄생했는데 그것은 우주로 날아간 아폴로 11호나 디스커버리호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리스본은 더이상 서쪽의 세상의 끝에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바로 다른 세상을 여는 새로운 문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카라벨라는 이런 문의 열쇠였다.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서 눈을 돌렸고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21세기 들어 포르투갈이 낳은 가장 세계적인 인물을 뽑으라면 역시나 호날두이다. 현재의 메시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그는 축구 실력과 함께 섹시한 외모와 몸 그리고 여러 가십으로 항상 전 세계 사람들에 많은 관심을 불러온다. 많은 가십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과 유약한 건강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축구에 관해서 엘리트 코스를 밝으면서 승승장구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는 포르투갈에서 1000km나 멀리 떨어져 있는 마데이라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이 마데이라섬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유럽의 포르투갈에서 엄청 떨어져 있고 오히려 아프리카 대륙에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호날두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건강조차 좋지 못했다. 이 두 가지의 무시무시한 악조건에도, 그는 최고의 재능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축구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 축구에 대한 사랑은 1000km나 떨어진 마데이라섬에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으로 그리고 런던을 거쳐 세계 최고의 클럽이 있는 마드리드와 유벤투스까지 오게끔 했다. 그렇게 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
호날두가 마데이라섬에서 축구를 시작해서 세계의 최고가 되기 600년 전, 포르투갈의 바다의 왕자 엔히키 왕자는 사그리스 해상 학교를 중심으로 더 커다란 세계를 만나기 위한 해상진출을 시작하였다.
이 해상진출의 첫 번째 업적이 바로 아프리카의 세우타 정복과 이 마데이라섬의 진출이었다. 이 마데이라섬은 포르투갈에 처음으로 해상 진출로 얻은 해외 영토였다.
그 뒤로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의 업적은 대단하였다. 포르투갈은 모든 해외 진출의 기록을 계속 경신해 나갔다. 많은 섬에 진출하고 당시의 인간이 갈 수 있는 마지막 선이라는 ‘까보 보자도르’를 통과하였고, 아프리카 최남단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바스코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이런 해외 팽창과 진출의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영토의 정복과 상품을 유입함으로써 얻어지는 부의 습득이었다.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통한 해상 진출로 이러한 모험은 아주 뜨거워졌다.
물론 바다로 떠나는 모험이 오직 부와 영토 확장만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모험의 낭만 또한 존재했다. 아직 알지 못한 세상, 무지개 저 너머의 세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바다 저편에는 지옥으로 가는 낭떠러지가 있다는 이야기로부터 인어공주를 만났다는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바로 ‘사제왕 요한’이었다.
저 바다를 넘어 한참을 가게 되면 이상적인 기독교 왕국이 있는데, 그곳의 왕이 바로 사제왕 요한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 세력은 항상 이슬람 세력과의 갈등과 분쟁에 시달렸는데, 바로 사제왕 요한은 이슬람 세력을 쳐 부셔줄 희망이었다.
사제왕 요한은 지금의 슈퍼히어로 같이 영화나 픽션에서나 존재하는 주인공이 보다는 훨씬 더 실재적이었다. 우리가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상상하는 외계 행성이나 외계인에 대한 상상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인 존재였다.
사제왕 요한을 찾기 위한 탐험과 모험을 시작하는 배들이 바다를 향해서 계속 띄워졌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사제왕 요한을 찾지 못했고,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지역에 사제왕 요한의 나라가 있으리라 추정될 뿐이었다.
결국, 18세기 초 에티오피아가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에 무너지자 사제왕 요한의 신화도 사라지게 되었다.
사제왕 요한의 이야기는 판타지와 탐험이 결합한 이야기였고 그것의 화학 작용은 아주 컸다.
바스쿠 다가마 이전에, 아프리카의 희망봉은 바르톨로메우 지아스란 사람에 의해 이미 발견되었었는데, 그가 떠난 많은 출정과 원정 탐험은 바로 사제왕 요한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는 교황의 명령으로 사제왕 요한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 연안을 많이 탐색하러 갔고, 이 원정은 그를 아프리카 최남단인 희망봉까지 데려갔다.
그의 수많은 원정 경험은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발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로 남하해서 희망봉을 돌고 돌아서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경험과 충고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서양에서 어디서 어떤 바람이 부는지 어디에 곶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1500년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은 국왕의 명령을 받고 인도로 향한다. 그런데 그는 인도로 가는 길 도중에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는 지금의 바이아주 포르투 세그루 지역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는 그곳에 미사를 드리면서 이곳이 하나님의 땅임을 선포하고, 2명의 죄수를 남겨두고 다시 인도로 향했다.
사람들은 이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 혹은 브라질 도착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한 이야기는 그저 풍랑으로 인해서 우연히 브라질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포르투갈은 이미 브라질이 위치한 신대륙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경쟁국이나 주변국에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인도로 간다고는 했지만, 포르투갈 국왕의 비밀 명령에 따른 새로운 땅의 탐험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공통된 사실은 대서양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강한 바람이 이들을 브라질로 인도했다는 점이다.
카브랄의 탐험에는 대서양 항로의 귀재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도 동행했다. 사실 카브랄은 탐험가가 아니라 군인이었다. 당시에 새로운 탐험과 탐색에는 거의 탐험가가 떠났지만, 새로운 길을 통해 인도로 가는 임무를 카브랄이 맡은 것은 바스코 다 가마의 여정 중 많은 곳에서 공격과 전투가 있었고 그로 인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많은 양의 후추를 가져오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격과 전투에 강한 군인인 카브랄이 이 임무에 적격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리고 탐험과 항로의 지식이 별로 없는 그를 도와서 경험이 많은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동행한 것이다.
선단도 13척이나 되는 큰 규모로 꾸려졌다. 이 선단에는 선원, 탐험가, 군인뿐 아니라 다양한 나라의 상인들도 포함이 되었다. 이런 대규모의 선단이 대서양 어디선가 부는 강한 서풍의 존재를 몰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카브랄과 함께 브라질에 도착한 후 다시 인도로 향하는 도중에 자신이 발견한 아프리카 희망봉에서 폭풍을 만나 파란만장한 삶을 끝나게 된다. 인도의 발견은 바스코 다 가마에게, 브라질의 발견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에 공을 넘기고 그는 마치 무관의 제왕인 양 자신 발견한 아프리카의 희망봉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그곳에서 전설이 되었고 마치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나오는 것 같은 유령선의 원조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서양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강한 바람은 이 포르투갈인들을 브라질로 도착시켰다. 그리고 이 강한 서풍은 계속해서 유럽에서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브라질로 데리고 갔다.
동인도 제도는 말 그대로 인도의 동쪽인 동남아 지역, 오세아니아 지역을 의미한다. 그럼 서인도 제도는 어디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 지역은 인도의 서쪽에 있는 어디인가가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카리브 제도(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등의 나라가 있는)를 의미한다.
15세기 후반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또 다른 길을 찾는 붐이 일었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탐험 또한 계속되었다.
이러한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순수한 동경이나 기독교 사상을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는 신념에 의해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역시 향신료의 교역과 금은보석이 있는 땅의 발견하는 데 있었다. 당시의 인도는 이를 위한 미지의 땅이었고, 새로운 세상이자 향신료와 금은보석의 보물의 땅의 상징처럼 되었다.
우리가 잘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처음으로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는 인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스페인에서 출발하여 처음으로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디고 유럽에 돌아갔다. 그가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생각했던 그 땅은 억울하게도 인도가 아니고 아메리카 대륙의 서인도 제도의 한 섬이었다.
그는 귀국 후에 사람들에게 자신이 인도에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고 이야기하고 그 증표로 금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유럽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새로운 인도 사람 즉 인디오를 만났다 - 당연히 인도 사람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은 인디오라고 불린다. 브라질에서는 원주민을 인디오라고 부르고 인도 사람을 인디아노라고 부른다.
그는 항해 중의 많은 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하기도 하였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인어 이야기나 괴물 이야기는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무엇보다 그가 가져온 소량의 금은 금빛의 새로운 땅에 대한 탐험을 부채질했다.
금의 가치가 대단한 것은 그 찬란한 빛으로 사람의 눈과 이성을 멀게 만든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은 대대적으로 이 탐험에 착수했다.
그는 몇 차례 더 항해를 계속했고 그것이 현재의 미국 땅 발견에 토대가 되었다. 많은 항해와 탐험을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던 대항해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게 된 것이다. 항해와 탐험 그리고 경쟁은 많은 과학적인 진보를 가져다주었다.
신대륙, 특히 남미에서의 금과 은, 새로운 자원의 유럽유입으로 대규모 경영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가 견고한 사회 시스템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못된 짓으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못된 행동들을 서슴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처음부터 이미 많은 인디오를 학살하고 학대받고 노예로 삼았다. 그는 아주 무식할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콜럼버스의 달걀의 일화는 발상의 전환이라고 말하지만, 그냥 무식한 스타일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달걀 아래를 부숴 세우는 그의 달걀 세우기 방법은 그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던 세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왠지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 같다. ‘젊은이여 야망을 품어라!’
1492년 10월 12일은 인도에서 너무나 먼, 인도의 반대편인 서인도 제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날이다. 이날은 세계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날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날을 신세계(새로운 세상)를 발견한 날이라고 추앙하고, '콜럼버스의 날'이라고 기념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이었겠지만 그곳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들에게는 재앙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 날 이후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인디오가 새로운 세상의 주인들 때문에 자신이 살던 땅에서 사라졌는가?
하지만 이제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도, 아메리카 땅에 사는 인디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오늘날에 들어서 콜럼버스의 발견은 인디오의 저항을 생각하는 의미로 바뀌고 있다.
브라질에서도 카브랄이 1500년에 브라질 발견이란 말보다는 브라질의 도착이란 말로 바뀌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사람들(인디오)이 잘 살고 있는데 브라질을 발견했다는 말 자체가 넌센스이다.
1970년대 밥 말리, 피터 토시, 버니 웨일러가 함께했든 레게 밴드 “웨일러스”는 “당신은 젊은이를 비난할 수 없어”란 곡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당신들은 젊은이들에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해서 가르치지!
그가 아주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말이야.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약탈하고 강간하고 납치하고 살인하는 일을 했었던 거지
그러니 당신들은 젊은이를 비난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