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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철 Jan 12. 2019

<칼라 오브 브라질>  
02. 인디오의 브라질


태양을 향한다는 것


우리는 ‘해가 떴다’라고 표현을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해가 (태어) 났다’라고 표현을 한다. 그러니깐 매일매일 태양은 태어나는 셈이다. 어제도 태양이 났고 오늘도 났고 내일도 날 것이다.

<리우의 일출,  이렇게 해가 뜰 시간이면 동네의 빵장수가 경적을 빵빵거리며 빵을 팔며 돌아다녔다. 이 사진이 그 ‘빵빵’ 거리는 속에 찍혔다. 일요일을 제외한다면 이런 장면은 항상 빵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보게 되어서 왠지 태양이 빵빵 거리면서 나오는것 같기도 하다.>



1500년 포르투갈을 떠난 카브랄의 선단은 한 무리의 새 떼를 만난다. 그 새들은 땅에서 서식하는 새라는 것을 알아차린 탐험대는 그 새를 따라서 처음으로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내 곧 인디오들과 만났다. 그들의 만남은 길지도 않았지만 별 충돌 없이 서로를 만났다. 

첫 만남에서 인디오들은 유럽인들의 복장이나 물건들을 신기해했다. 그들은 별 두려움이 없었다. 

그 수백년만의 첫만남은 마치 축제같았다. 아니 축제 였다. 그들은 서로를 만져보기도 했고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너무 신이나서 공중 제비를 돌기도 했다. 

왠지 우리는 서로 싸우고 죽이고 정복했을것 같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인간과 인간이 처음 만나는 그 장면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이내 카브랄은 새로운 땅의 해변에서 미사를 집정했다.

인디오들은 처음 보는 유럽 사람들과 그들의 이상한 종교 활동을 바라보았다. 


카브랄은 그의 부하 ‘가스파르 지 레모스’를 포르투갈로 되돌려 보내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고 알리도록 하고, 다시 인도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포르투갈 국왕에게 그들이 처음 도착한 땅에 금은보석이나 후추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알렸다.


물론 브라질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땅이 아니었다.

카브랄이 도착하기 전까지 브라질은 원주민 즉 인디오가 사는 땅이었다. 브라질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그들이 사는 땅이었다.

콜럼버스 이전 긴 유럽인의 역사 동안 그들은 아메리카 땅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어디서 왔는지도 잘 모른다. 많은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아주 먼 옛날 매일 태어나는 태양을 찾아서 계속 동쪽으로 이주한 것일 수도 있다.

인디오들은 우리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바로 아시아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콜럼버스가 인도 사람이라고 헷갈릴 만도 하다. 하지만 아메리카의 인디오들은 인도 사람보다는 동북아 혹은 중앙아시아의 아시아 몽골 인종에 더 가까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검은 머리에 서양 사람이 바라보기에 째진 눈, 그리고 우리와 같은 몽고 점도 가지고 있다.


아주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기에도 너무도 추었던 빙하기가 끝이 날 무렵에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는 얼어있어서 그곳을 건너갈 수 있었다고 한다.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는 베링 해협이라 불리는 데, 사람들은 화천의 산천어 축제처럼 얼음물 위를 걸어서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를 건너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아시아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

그러니깐 인디오의 단군과 우리의 단군이 같을 수도 있는 셈이다.


왜 그들이 이주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추운 날씨 때문에 더욱 태양에 가까이 가고 싶어서 동쪽으로 이주를 했는지 모르겠다. 

혹은 유럽 사람들이 대서양 너머 새로운 세상의 모험을 생각한 것처럼 태양이 나는 곳 아래에 멋진 새로운 세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주를 했고,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러 남쪽으로 이주를 거듭하면서 지금의 인디오라고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넓은 땅덩어리에서 서로 모여 살면서 부족을 이루기도 하고, 부족이 모여 큰 부족을 형성하기도 하고, 또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멕시코 인근의 아스테카(메시카나) 문명과 잉카 문명, 안데스 산맥의 마야 문명 등 화려한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사람의 왕래가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 처녀림 아마존 이남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아마존 위쪽에 살던 인디오와는 조금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문명도 없었고 왕국도 없었다. 그저 부족의 수준으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존 지역과 그 이남의 지역 인디오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우리와는 완전하게 다른 환경에서 살았고, 사고방식 또한 다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정말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살았다. 그들은 하늘을 벗 삼아 잠을 자도 얼어 죽을 걱정이 없었다. 힘겹게 농사를 짓지 않고 수렵과 채집만으로도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많은 과일과 물고기, 동물 등이 천지에 널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저장의 개념도 없었다. 잉여의 개념도 없었다. 노동의 개념도 없었고, 노동으로 벌어드린 재화의 개념도 없었다. 그리고 그 재화의 교환이란 개념도 필요 없었다. 땅덩어리는 넓었기 때문에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은 그들로서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주위에 먹을 것이 넘쳐나는데 뭐하러 저장을 하고 빼앗는다는 말인가?

그들의 부족은 평화로운 공동체였다. 군주나 주종의 관계도 있지 않았다. 계급이 있지도 않았다. 부족 사람들은 함께 수렵과 채집하고 함께 나누어 먹었다. 완전한 공산주의 공동체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과 함께 하는 지혜였다. 먹을 수 있는 식물이나 버섯에 관한 것이었고, 물고기를 잡는 방법 같은 것이었다. 

자연은 그들에 끊임없이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곳이기에, 자연의 보전과 순환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인디오들은 자신을 자연 일부로 인식하고 자연은 계속 돌고 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니깐 동네의 나무를 뽑으면 그것이 돌고 돌아 그러니 자기한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발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인디오들에게는 생명을 계속해서 주는 자연의 신들에게 제례를 보내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먹고사는 데 쓰는 것 외에 남아도는 에너지는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도기에 문양을 새기는 것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인디오 사회는 아주 이상적인 사회 같기도 하고 이상한 사회 같기도 했다.

그들은 남는 에너지를 부족 간의 전쟁을 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그 전쟁이라는 것으로 용맹을 뽐내고 싶어 했다. 그것은 정복과 착취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용맹은 존엄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쟁은 마치 축제처럼 이루어졌다.


인디오들에게는 인간의 질서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인디오들이 가장 악명 높고 야만적이라는 식인 풍습, 그리고 많은 인디오 전설에 나오는 인간을 그들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풍습만 봐도 그러했다. 식인 풍습은 순환의 개념 아래에 행해진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먹으면 그 용맹함이 마치 영양소처럼 자신의 것으로 얻어진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풍습들은 우리의 사고방식으로써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브라질 인디오들의 삶은 다른 대륙에서의 삶과는 완전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아스텍이나 잉카 마야 문명을 이루었던 아마존 이북 인디오들의 삶과도 다른 삶이었다. 이들 (아마존 이북) 인디오들은 사회적 계급이 존재하였고, 왕국의 건설을 위해서 역시나 노예를 부리고 피지배계급이 착취되었다.



태양을 등진다는 것


유럽의 탐험가와 왕정은 서쪽으로 가면 태양 반대편, 대서양 너머에 황금의 땅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어쩌면 석양의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서쪽의 바다가 황금빛으로 반사된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너머에 엘도라도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과 욕망의 꿈을 꾸었다. 

그 대서양 너머에 있는 브라질은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녹색의 땅이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곳에서 황금이나 후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에 브라질이 섬이라고 생각했고 '성스러운 십자가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새로운 땅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앵무새였다. 그래서 '앵무새 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앵무새의 땅은 녹색으로 가득한 평화로운 땅이었다.


<숯불 고기 구이 슈하스코>


브라질에는 슈하스코라고 부르는 숯불 바비큐 방식이 있는데, 이 슈하스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비큐 방식이 되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는 많은 슈하스코 레스토랑으로 퍼져 있다. 이 슈하스코는 긴 꼬챙이에 다양한 고기를 꽂아서 시뻘건 숯불 위에 얹어 구워 먹는 방식이다. 똑같은 고기를 구워도 굽는 요령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데, 슈하스코의 장인들은 그 맛의 비법을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브라사(Brasa)에 있어요.”

 시뻘건 숯불을 의미하는 ‘브라사’의 느낌을 알아야 고기가 아주 맛있어진다는 말이다.

 브라질이란 나라의 명칭은 브라질 나무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브라질 나무란 명칭은 ‘브라사'란 말에서 왔다. 

즉 브라질 나무는 불꽃같은 색의 나무란 뜻이다. 브라질 나무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붉은색 염료가 나왔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이 나무에서 나온 염료로 만든 붉은색 천은 아주 높은 가격으로 팔렸다. 브라질 나무는 유럽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예전에 '신기한 앵무새의 나라’, ‘성스러운 십자가의 나라’였던 것이 브라질 나무가 주목을 받자 ‘브라질’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다. 

이 브라질이란 나무의 가치가 알려지자 많은 유럽 사람들은 브라질에 진출했다.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이 먼저 브라질에서 브라질 나무를 베어다 유럽에서 팔기 시작했다. 예전의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고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브라질 나무가 발견된 후에는 다른 나라에서 브라질에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브라질 영토의 권한 있는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식민지로 하고, 본격적으로 브라질 나무를 유럽에 팔기 시작했다. 이미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한 경험이 있는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사용했던 ‘페이토리아'를 만들었다. 페이토리아는 국가가 운영하거나 허가를 내주는 일종에 교역소이자 창고였다. 브라질 나무는 베어져서 이 페이토리아에 모여졌다.


포르투갈인들이 익숙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브라질 땅에서 배를 정박하고, 그 넓은 브라질의 내륙에 브라질 나무를 찾아서 베고, 다시 그것을 배로 이동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그곳 현지 사람의 가이드와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당시 브라질 현지 사람, 즉 인디오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처음에 포르투갈인들은 인디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쇠로 만들어진 칼, 거울 그리고 장식품 등을 가지고 브라질로 들어왔다. 인디오들이 이런 것들을 신기해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이런 물품을 인디오에 선물했고 인디오들은 브라질 나무의 정보와 노동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결국 포르투갈인들은 인디오를 무력으로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인디오의 노예 노동력으로 브라질 나무를 수출해서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이런 비인간적이고 불공정한 관계는 당연시되었다. 부에 대한 욕망은 많은 일을 서슴지 않고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랑의 하나님 가르침 아래 기독교란 종교가 유럽의 사상이자 지배적인 문화였는데도 이런 잔인한 인디오의 노예화는 계속되었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자행된 데에는 인디오는 유럽인들과 다르다는 이유였다.

유럽인들은 사고방식과 삶에 대한 관념이 자신들과 너무나 다른 인디오들에게 편견을 가지게 되었고, 인디오들은 영혼이 없다고 믿으려고 했다. 특히 인디오 부족의 식인 풍습은 부정적인 편견을 더욱 강하게 했다.


인디오들을 포획해서 노예화하고 그들은 잔인하게 다룬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역병이었다.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는 병균들에 대해서 인디오들은 전혀 내성이 없었고 또 쉽게 전염이 되었다. 작은 감기에도 마을 전체가 없어질 정도이었다. 수두, 홍역, 콜레라 같은 병들이 지금의 사스, 메르스 같은 신종 병균처럼 속수무책으로 퍼졌고 이런 병균에 내성이 전혀 없는 인디오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파괴되었다.

 500만 명의 인디오 인구는 백 년도 안 돼서 절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지금의 인디오 인구는 약 27만 명 정도로 되어버렸다. 

인디오들이 전체를 차지했던 브라질에서 현재 인디오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도 작아졌다. 오늘날 브라질에선 인디오들은 오지를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브라질 나무도 너무 많이 베어져 싹이 말라 국립공원에서나 겨우 보호받아야 볼 수 있는 기념물이 되었다. 브라질 나무의 그 붉은색은 마치 인디오의 피처럼 사라져 갔다.




니무엔다주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제이크 설리에게도 나비 족의 이름이 주어졌을까? 

영화 '아바타'의 이야기 구조는 500년 전 남미의 인디오 부족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는 외계의 어느 행성에 있는 나비 족으로 간 지구인의 이야기이지만 이는 과거 혹은 현재의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원 때문에 나비 족을 정복하려는 설정은 남미에서 혹은 아프리카에서 자원이 있는 곳이라면 항상 그러했다. 우리나라도 그런 역사가 있지 않았는가? 아바타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지구의 역사에서 그런 장면은 별로 목격되지 않았다. 

남미의 인디오들에게는 아직도 여러 비극으로 남아 있다. 그렇듯 포르투갈이 브라질에 도착한 후 인디오의 역사는 항상 비극적이었다. 


브라질 땅에서 자원이 발견될 때마다 인디오들은 고통을 받았다.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잘살고 있던 터전 근처에 무언가가 발견되면 그 부족은 쑥대밭이 되었다. 브라질 나무의 벌목, 사탕수수 농업, 금, 광물, 고무 등의 자원이 개발될 때마다 그들은 노예로 잡히거나 죽임을 달하거나 혹은 개발을 위해서 겁주기나 테러를 통해 쫓겨났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 사실 어쩌면 경우나 경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마존의 산림을 개발하면 그곳의 인디오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다. 경작지를 만들거나, 가축을 기르는 방목지를 만들어도 그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계속 살아온 자신들의 땅에서 말이다.

우리가 발전이라고 믿고 있는 개발이란 개념은 인디오들이 살아온 삶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들은 현재까지 자연과 함께 살아왔다. 그들은 모든 자연은 인간을 포함해서 모두가 연결되어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무 한 그루를 베는 것도 정치, 종교, 사회, 문화가 다 연결이 되어있다. 땅의 소유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땅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땅이란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도 되지만 동식물이 자라고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곤충들까지 말이다. 

하지만 외부의 권력들, 예전의 왕족, 귀족, 백작들 그리고 오늘날의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들을 땅에서 쫓아냈다.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예고 살인이나 본보기 살인이 자행되었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사회적으로도 인디오들은 브라질 사회에서 마치 왕따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브라질 사회에서 어리석고 멍청하고 추한 존재라는 편견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편견은 아주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저 아무 이유 없이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니무엔다주란 이름이 있다. 그 뜻은 인디오 부족 과라니의 말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1900년대 초반에 브라질에 실존하던 사람 이름이다. 

사실 그는 인디오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투르트 운켈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독일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1903년 무일푼 이민자로 브라질로 왔으며,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상파울루에서 살기 시작하는 그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내륙지방에 있는 부족 난데 바-과라니족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그 뒤로 그는 자신의 모든 일생을 인디오 부족과 함께 살았다. 그는 원주민 권리의 옹호자이자 뛰어난 인류학자가 되었다.

그는 과라니 부족의 정교한 의식을 통해서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니무엔다주란 이름을 얻었다. 이민자인 그는 나중에 브라질 시민권을 얻었는데, 그때 그의 이름을 쿠르트 운켈에서 쿠르트 니무엔다주로 정했다. 그는 남부 브라질의 부족들과 함께 살았고, 그 뒤 아마존으로 넘어가 아마존의 부족들과 함께 지냈으며 그 후에는 북부의 아마파 주의 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62세의 나이로 사망을 했고 그 당시 아마존의 솔리몽이스 강에 있는 티쿠나 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집단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몸으로 직접 느끼기 위해, 다시 말해 그들과 같은 위협을 느끼고 같은 희망을 키우며 같은 불의와 억압에 분노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협, 불의, 억압 그리고 희망 같은 우리에게 실용적이지 않은 단어를 이야기하면서 평생을 인디오의 평온한 삶을 사랑한 그는 45개 부족의 연구 성과를 내놓았고 인류학 연구, 고고학 발굴, 부족의 탐사 원정들의 업적을 쌓았다.


브라질 정부는 1960년대에 이르러 인디오 보호법을 내놓았다. 이 법을 통해서 인디오는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토지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여전히 알게 모르게 인디오들의 실종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서구와 인디오의 대립과 분쟁은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늑대와의 춤을’이란 영화도 있었고 ‘라스트 모히칸’ 이란 영화도 있었다.

이런 영화에서는 누군가의 승리가 아니라 공존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영화에서는 아름답고 멋지게 그려졌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분명 쉽지 않은 문제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공존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상대방의 이익은 마치 나의 손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편견과 미워함 같은 쉬운 방법과 생각을 사용한다.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삶에 대해서 낙천적인 것은 역사는 발전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인디오 보호지역에서 만난 인디오 아이들, 이중에 한명은 내 조카와 너무 닮아서 여기에 놀러 왔는지 알았다.>



투팍 아마루


한때 우리에게 팬플루트란 악기와 오카리나라는 악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 악기를 연습할 때면 정말 많은 사람이 꼭 필수적으로 연주했던 곡이 있다. 그 곡은 바로 ‘엘 콘도 파사’, 우리에게는 ‘철새는 날아가고’라는 제목으로 소개가 된 곡이다. 


왜 콘도란 새가 철새로 둔갑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미의 안데스 산맥의 아련함이 느껴지는 페루 노래였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노래로도 많이 알려진 특히 우리나라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달팽이보단 참새가 될래요~’라는 가사 때문에 한층 더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노래는 코미디의 소재가 되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강렬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페루의 작곡자 다니엘 알로미아 로블레스가 안데스의 전통 민요를 바탕으로 만든 노래로, 음악극 ‘콘도르칸키'에 실려 있다. 이 음악극은 바로 18세기 후반에 스페인의 잉카 침략과 정복에 맞서 페루에서 있었던 대규모 민중 봉기의 영웅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 일명 투팍 아마루 2세의 이야기이다. 

안데스 지역에서 콘도르라는 새는 특별한 새이고 자유의 상징이다. 그들은 영웅이 죽으면 콘도로 환생한다는 전설을 하고 있다. '엘 콘도 파사'는 전설적인 영웅 투팍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와 잉카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투팍 아마루는 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였고 마지막까지 스페인에 대항한 사람이었다. 잉카제국은 결국 스페인에 의해서 무너졌고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그가 사랑하는 그녀의 아내는 임신한 상태였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건강 때문에 빠르고 많은 이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스페인 군대에 잡혀서 처형을 당하고 잉카제국은 완전히 패망하였다.

그의 아내와 배속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많은 투팍 아마루가 세상에 나왔다.  

그들은 바로 18세기의 투팍 아마루 2세(호세 가브리엘 콘도르 칸키)이고 20세기에 들어서는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빛나는 길들의 게릴라들이었다. 

그리고 미국 힙합의 황태자이자 THUG LIFE의 창시자 아이콘 투팍 아마루 샤커이다.


잉카제국이 망하고 스페인이 남미를 정복하자 인디오들은 스페인의 폭정에 고통과 착취를 당했다. 이러한 고통과 착취에 대항해서 많은 민중 봉기가 발생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18세기에 있었던 잉카 부흥 민중 봉기이다. 이 봉기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호세 가르리엘 콘도르칸키였다. 그는 스스로 투팍 아마루 황제의 후손임을 자처했고 투팍 아마루 2세라고 불렀다. 

이 투팍 아마루 민중 봉기는 잉카의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난 후에 일어났다. 이 민중 봉기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결국 그는 스페인 군대에 잡혀서 페루의 쿠스크의 광장에서 사지가 찢기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처형 중에 그의 신체를 묶은 말도 잉카의 슬픔을 아는지 움직이는 것을 거부해서 결국 칼로 목을 잘리고 내장이 파이고 사지가 잘리는 처형을 받았다.

그의 민중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 뒤로 남미의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시몬 볼리바에 의해서 남미의 독립이 성취되었다. 

하지만 남미의 독립이 인디오의 삶의 자유와 영광을 준 것은 아니었다.


“THUG LIFE”로 잘 알려진 투팍 아마루 샤커 역시 남미의 황제 투팍 아마루의 이름을 따왔고 예명이 아닌 그의 본명이다. 그의 어머니는 흑인 인권을 위한 무장 조직인 블랙 팬더-여기서 팬더는 팬더 곰이 아닌 표범의 팬더이다-에서 활동을 하다가 투옥이 되었는데 그때 그는 투팍을 임신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이름을 투팍 아마루라고 지었다. (샤커는 그의 성이다.)  

이 아이는 나중에 힙합, 랩을 통해서 억압받는 흑인의 삶을 노래하고 터그 라이프를 부르짖었다. 

터크 라이프는 단순하게 갱스터의 삶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에는 그의 삶과 음악은 분명한 심연을 보여준다. 그는 당시의 미국 흑인들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해준다.

Thug Life는 차별과 억압의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시이며 불평등한 상황에 순응이 아니라 마이너리티, 잉여인간이 가지는 주체적인 삶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는 성폭행과 갱단의 연루, 여러 가지 추문과 감옥살이, 이스트코스트와 웨스트코스트의 랩 전쟁으로 악명의 악동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논란은 그의 음반을 더 팔리게 그리고 더 큰 악명 혹은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쇼비지니즘의 종사자들은 그의 악명과 명성을 더욱더 이용, 악용하였다.

그는 결국 레볼루션너리와 엔터테이너 혹은 갱스터의 경계에서 외줄 타기를 하다가 결국 총격으로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12년 후 미국은 흑인 대통령이 당선시켰다.


스페인의 맹렬한 추격에 살기 위해 아내와 뱃속의 있는 아이를 버리지 않고 그들을 위해 천천히 이동했던 투팍 아마루  

잉카의 마지막 황제인 그는 처형당했지만, 그의 사랑의 징표는 아직 계속해서 남아 있다. 이 사랑은 공정하지 못한 것, 억압을 당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고 항거해서 더 큰 사랑과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랑은 자유와 해방의 이름으로 우리의 하늘을 콘도르처럼 날아다닐 것이다. 



<그림  일몰로 유명한 이파네마 해변, 사람들은 이 일몰이 아름다워서인지, 혹은 오늘 하루나 태양에 대한 감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일몰이 지면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만일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으면 그냥 내가 박수를 치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함께 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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