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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철 Jan 12. 2019

<칼라 오브 브라질>
03. 아프리카의 브라질

여왕님의 이빨


 브라질 여인들은 정말 활짝, 치아가 빛이 나도록 미소를 짓는다. 난 아직도 예전에 아날로그 카메라로 찍은 클라우지아의 사진을 잃어버린 것이 안타깝다. 친구 클라우지아는 이사 가기 전날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사진을 찍었다. 그날 날씨는 태양 빛도 하늘도 아주 끝내줬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그 모든 것들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찬란한 햇살보다 더욱 찬란한 그녀의 미소의 백미는 그야말로 활짝 벌어진 입술에 하얀 치아였다. 

 

 지금이야 셀카 다 뭐다 카메라를 보고 환하게 웃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하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아주 옛날에는 치아가 보이게 활짝 웃는다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듯하다. 옛날의 그림들을 보면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그러한 근엄함은 권위가 되어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지폐에 그려져 있는 위인들의 표정처럼 예전의 초상화나 인물화들은 모두 하나 같이 무표정이었다. 

 모두가 같은 무표정이라서 혹시 무언가 공통의 표식이나 신호 같은 음모가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과거 사람들은 언제 웃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 시대에는 웃는다는 것,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일종의 쾌락으로써 죄악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한편 모나리자의 미소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지, 왜 명작이 되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

 모나리자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을 통치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화는 입술을 굳건하게 다물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은 차가워 보이고 무섭게 보이기도 한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라는 그녀의 말은 그녀의 표정에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미소를 띠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면, 그녀가 박장대소를 하는 모습은 본 사람이 있다면 그녀의 이빨이 검은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굳건한 표정에서 김을 치아에 붙이고 미소를 띠는 그런 코미디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설탕을 아주 좋아했고 그래서 많은 이가 썩었다. 영국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가 아니라 여왕님 이빨은 검게 썩은 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리고 여왕의 이가 얼마나 썩었는지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우리가 맛집의 비밀은 농담처럼 (화학) 조미료와 설탕을 한 봉지 넣는 것이라고 진실 같은 과장을 하는 것처럼, 어떤 음식이든지 설탕을 듬뿍 치기만 하면 맛있다고 느껴진다. 이 강한 단맛은 즉각적으로 뇌에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설탕 맛을 본 사람들은 더더욱 설탕을 원한다. 더욱이 냉장고가 없던 시절, 쉽게 변질되던 음식 맛을 감추고 미각을 주기 위한 향신료로서 설탕 역시 마법 같은 존재였다. 

 설탕은 그야말로 단맛이다. 엘리자베스는 설탕을 사랑했고 그 단맛을 사랑했다. 어쩌면 그녀는 남성의 달고 씁쓸한 맛보다는 설탕의 단맛을 더욱 좋아했을지 모른다. 설탕의 단맛이 주는 쾌감이 그녀가 독신으로서 영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설탕도 역시 인도 출신이며, 이슬람을 통해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슬람은 인도로부터 설탕 제조 기술을 배우고, 그 산업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들은 덥고 비가 많은 열대 기후에서 잘 자라는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인공 급수 시설을 이용하였다. 이슬람은 가는 곳마다 기후가 맞으면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제조했다. 이슬람이 지중해 연안의 섬인 시실리를 통치하게 되자, 사탕수수와 설탕도 따라서 왔다. 이내 유럽인들은 설탕을 만났고 바로 그 달콤함에 매료되었다.


 유럽인들이 설탕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이다. 이슬람의 땅에서 그들은 이 ‘달콤한 소금’을 실은 수레를 종종 접하게 되었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기술을 배웠다.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일부 (전직) 십자군들은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거나 설탕 교역을 지속했다. 

 설탕 산업은 특히 지중해 연안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의 기후는 여름엔 매우 더워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좋았지만, 겨울엔 다소 기온이 낮아 최적의 환경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 생산량은 많지 않았고, 사탕수수는 여전히 후추만큼이나 귀한 수입품이었다. 


포르투갈은 처음으로 마데이라섬에 사탕수수를 경작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유럽의 나라들은 다양한 지역에서 사탕수수 경작을 시도해 보았다.

 이윽고 서인도제도 지역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브라질에서 좋은 뉴스가 날아왔다. 별 볼일 없던 지역같았던 브라질이 사탕수수 재배의 최적지로 판명이 된 것이다. 유럽인들은 새로운 땅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신대륙에 설탕 산업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설탕을 제조하기 위해선 먼저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그것을 잘라서 바로 즙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분과 함께 설탕이 손실된다. 그렇게 낸 즙을 가열, 가공해서 설탕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사탕수수 농장에 제당소가 있어야 했고,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식민지 브라질, 특히 바이아 지역의 풍토는 사탕수수 재배에 아주 적격이었지만 일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디오를 노예로 만들어서 노동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인디오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잉여, 저장의 개념이 없는 인디오들은 노동에 대한 개념도 달랐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노동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위해서 혹은 잉여 재화를 만들기 위해서 노동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강제적으로 노동을 한다는 것이 그들에겐 먹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브라질은 인디오들의 홈그라운드, 그들의 터전이었다. 그들은 노동을 강요하는 포르투갈인들에게 반항하거나 도망가기 일쑤였고 지형을 잘 아는 그들에 비교해 포르투갈인은 훨씬 불리했다. 또한, 때때로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포르투갈인들에게 인디오를 노동에 길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한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싼값으로 노예를 사 와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의 대규모 노동을 충당하고, 거기서 생산된 설탕을 유럽에다 팔았다. 

 설탕의 생산량은 급격히 늘었다. 노예무역을 기반으로 한 노동력의 확보는 설탕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그렇게 해서 설탕의 가격은 내려갔다. 그러자 귀족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까지 설탕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설탕이 대중화되면서 더욱 많은 설탕을 필요해졌고 그럴수록 아프리카에서는 더 많은 노예가 수입되었다.

 설탕은 브라질의 금이었다. 

 유럽의 사람들이 하얀 설탕을 더 먹을수록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또한, 설탕의 달콤함이 주는 쾌감은 더 많은 아프리카의 흑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아무도 달콤한 설탕을 먹으면서 그것의 이면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직접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달콤함을 느끼면서 누가 그 속의 고통을 생각하겠는가?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맛있는 커피를 음미하면서 혹은 달콤한 초콜릿을 먹으면서 멋진 기후와 자연에서 자란 특별한 열매라는 광고를 보고 상상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수확하는 사람의 값싼 노동력의 고통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혹은 우리가 쓰는 스마트 폰이 누구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는지 우리가 신고 있는 멋진 신발이나 티셔츠가 누구의 손길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고 관심도 없다.  

 인디오들의 관점에서 비추어 보면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것들에는 그것을 거쳐 간 사람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체 운반선


시체 운반선. 사람들은 그 배를 그렇게 불렀다. 

그 배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배에서 내릴 때면 이 아프리카인들의 눈빛에는 이미 삶의 희망이 지워져 버렸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서 그들은 체념하게 되었고 스스로의 존엄은 없어져 버렸다.

그들의 고향에서 ‘돌아올 수 없는 문’을 지나 40일 정도의 대서양 횡단으로 브라질에 도착하게 되면, 그들의 신분은 노예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향은 마르지 않은 노예 공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대로 누울 공간도 충분한 공기나 물도 없이, 당연히 충분한 음식도 없이 그리고 화장실도 없이, 모든 사람이 이 끔찍한 배의 아래로 쌓인다. 이런 포악한 항해에서 이미 브라질에 도착하기 이전에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심지어는 반절의 정도가 죽어서 이미 바다로 던져졌다.

이런 배들은 너무나 끔찍해서 도착과 함께 한동안 방치되거나 심지어 버려지기도 했다. 배 안이 너무나 끔찍해서 누구도 청소할 엄두를 내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배를 툼베이루, 즉 시체 운반선이라고 불렀다.

<노예선, 상파울루 박물관>


아프리카 사람들은 도착과 함께 기름으로 목욕을 한다. 그렇게 하면 마치 보디빌더가 몸에 기름칠한 것처럼 윤이 번지르하게 흐르고 힘이 세 보여서 보다 상품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창고이자 시장에 모여지면 곧 노예를 살 주인들이 그들을 관찰하러 온다. 어떤 주인들은 노예를 때려서 그의 비명을 들어본다. 그의 비명 소리로 폐가 건강한지를 살펴보기도 한다.

그렇게 결정된 노예들은 주인 이름의 머리글자가 써진 뜨겁게 달구어진 쇳덩이로 낙인이 찍힌다.

‘말하는 도구’, 이것이 아프리카 노예였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 말 하는 도구가 노동으로 죽음까지 다다를 때 주인들은 잔치를 열고 빛나는 금과 은을 쌓는다.

이런 일, 즉 노예시장, 노예무역이 번성하게 된 것은 그것이 아주 큰 이익이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유럽의 포르투갈인, 영국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다가 다시 아메리카 대륙에다 팔았다.


노예는 인류의 역사에서 항상 등장했다. 과거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나 종족은 노예가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역시 종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다른 종족을 노예로 삼았었다. 유럽의 노예상들은 이런 노예들을 구매해서 다시 아메리카 땅으로 팔았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 덕에 풍요로워진 부족이나 정치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들에게도 유럽인들에게도 수익이 많이 나는 것이라서 많은 국가나 부족들이 예외 없이 뛰어들게 되었다. 이윽고 노예를 얻기 위한 전쟁이나 포획이 엄청나게 되어버렸다. 


아프리카는 노예가 부국강병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거나 노예를 포획하고, 노예를 팔아 자신들의 왕국을 더욱 부강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부강함으로 더욱 노예를 사냥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로 팔려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그렇게 멈출 수 없는 게임장이 되어버렸다.

이런 구조 속에서 아프리카는 곳곳에서 인구감소가 초래되었고, 아프리카에서 필요한 아프리카 노동력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것은 아프리카에는 부국강병이 아닌 더욱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유럽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면서 설탕을 팔아야 하는 식민지 브라질은 노동력이 엄청 필요했고 드디어 흑인 노예 수입으로 열을 올렸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설탕을 다시 유럽에다 판매하였다. 

사탕수수는 설탕뿐 아니라 술로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생산된 술이 바로 까샤샤나 럼주였다. 이 까샤샤와 럼주는 노예의 가격으로 교환되기도 했고 노예 수송선에 임금으로 지급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무역 시스템의 그림은 모두 유럽인들이 설계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수익은 유럽인들이 독식하였다. 

그렇게 많은 유럽의 노예상인, 아프리카의 노예 사냥꾼은 커다란 부를 형성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커다란 대저택을 짓고 농장을 사들여서 농장주가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많은이들의 롤모델이였다. 우리가 잘 아는 로빈슨 크로소 이야기 역시 브라질에서 사탕수수 농장주가 된 그가 무허가 노예상인을 하려다 배가 난파되어서 무인도에서 살게 된다.  


아프리카 땅에서 그저 잘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런 노예무역의 희생양이 되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 혹은 포획 속에 아프리카 사람들은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문’에서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고향을 떠나 지옥 같은 대서양 횡단을 해야만 했다.

바로 자신의 옆의 동료나 가족, 친구들이 죽어 바다로 던지지는 그 시체 운반선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완전히 낯선 땅, 무자비한 폭행으로 맞이하는 새로운 땅인 브라질에 도착하게 되면 완전히 삶의 희망을 잃어버렸다. 도망갈 곳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과 집을 강제로 떠나와서 머나먼 땅에서 노예가 되었다.

혹시나 반항하게 되면 끔찍한 고문과 죽음의 본보기가 돌아왔다. 

어떤 노예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했다. 죽으면 다시 자신들의 영혼이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인이 흑인 노예에 대해 잔인하게 대했다. 채찍질은 일상이 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체벌은 9일간의 체벌이었다. 거리에 묶어져 본보기로 채찍질을 당했다. 이런 체벌이 끝나면 목에 둘려진 사슬에 매달린 30kg에 육박한 나무통을 매달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했다.

어떨 때는 개미굴 위에 묶여서 밤새 노출이 되기도 했다. 별의별 고문과 체벌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흑인 노예들은 쉽게 소모되고 그저 소진되었다. 그들의 사망률은 치달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흑인 노예가 유입되었다. 흑인 노예의 수입은 증가하는 데 반해서 흑인 노예의 인구는 증가하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해서 기대수명은 6~7년에 불과했다. 그리고 평균 나이는 20살 정도였다.

주인들은 그것의 경제성을 알고 있었다. 흑인 노예들에게 한계를 넘어서 노동을 시키면 1년 정도면 이미 노예의 가격은 다 뽑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혹은 제당소 주인들은 부와 권력을 쟁취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300년이 훨씬 넘게 이런 노예 시스템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400만 명의 넘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브라질로 옮겨졌고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큰 노예 수입국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프리카가 아닌 아프리카의 인접국도 아닌, 대서양 넘어서 있는 다른 대륙인 남아메리카의 브라질이 현재 흑인 인구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나라가 되었다. 



게으름의 고개


바이아주에서 헤꽁까부 지역은 아프로 브라질의 아름다운 문화가 넘치는 곳이다. 헤꽁까부 지역은 '모든 성인들의 만(만의 이름이 ‘모든 성인들’이다)'을 주위의 지역을 말한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열대성의 아름다운 섬들로 둘러싸여 있다. 

얼마나 많은 노래가 이 지역과 이 지역의 문화를 칭송했던가? 

이 지역에 가면 뜨겁고 환한 태양의 열대 기후, 멋진 음악, 풍성한 문화들로 절로 행복감이 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모두가 손뼉을 치면서 부르는 ‘삼바 지 호다’를 본 적이 있으면 당신은 곧바로 행복의 포로가 될 것이다. 모두가 그렇다. 예외는 없이 말이다. 그래서 이곳의 노래는 특별하다.


‘게으름의 고개’이란 노래가 있다. 브라질의 명가수 질베르토 질이 만들고 노래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의 특유의 순수함과 익살로 ‘게으름의 고개’에서 게으름을 그리고 모든 성인의 만에 펼쳐진 섬들인 메두섬, 프라지섬, 살리나스 마가리다 섬, 마레섬 등등을 노래한다.

게으름의 고개은 바이아주의 주도 살바도르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은 아래의 바다 항구와 위의 도시를 연결해주는 오르막길이었다. 주로 배에서 내린 것들이 이 언덕을 통해서 이동되었는데 무거운 것을 가지고 올라가는 노예들은 이 오르막길의 경사 때문에 힘들어했었다.

그때마다 주인들이 ‘올라가라 게으름뱅이들아’하고 다그쳐서 게으름의 고개가 되었다.

이 언덕 아래로 ‘모든 성인들의 만’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게으름의 고개 근처. 보트가 정박한 아랫동네에서 높은 건물이 즐비한 윗동네까지 모든 것을 지고 날라야 했다.>

이 '모든 성인의 만'에 있는 아름다운 섬 중에서 노래 ‘게으름의 고개’에 등장하지 않는 섬 중에 까자이바 섬이 있다. 그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인데 왜냐하면 이렇게 멋지고 재미있는 노래와 어울리지 않는 악명이 있기 때문이다.

 까자이바 섬은 백작의 지위까지 올랐던 까자이바 소유의 섬이었다. 

까자이바 백작은 아주 유명한 군인이자 정치가 집안이다. 그의 집안은 식민시절 포르투갈에서 브라질이 독립하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자기 섬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과 제당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제당소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지금의 큰 기업과 마찬가지의 부와 권력을 의미했다.

그는 또한 노예들에게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루는 그가 그의 저택으로 손님을 대접한 적이 있는데, 그 손님이 그의 저택에서 일하는 여자 노예가 아름답고 또한 예쁜 가슴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그러자 그는 그 손님이 돌아갈 때쯤 해서 그를 기쁘게 해 줄 마음으로 그 손님이 칭찬했던 여자 노예의 가슴을 잘라다 쟁반에 담아서 그에게 선물했다.


무엇이 이토록 잔인하게 되었을까?

포르투갈에서 브라질에서 온 사람 중 많은 이들은 야심에 찬 모험가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부와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브라질로 왔다.

또한, 많은 이들은 범죄자이기도 했다. 포르투갈도 그들이 국가에서 멀리 있는 것이 좋았다. 적도의 선은 자유의 선이 되었다. 포르투갈에서 적도를 넘어서게 되면 범죄자도 과거의 그 죄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브라질은 넓은 땅덩어리에 비교해서 인구는 턱없이 적었다. 그래서 항상 사람이 필요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주로 가족도 없이 혼자서 브라질로 왔다. 가족이나 법도 없는 분위기였다.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는 분위기 속에 고립된 흑인 노예는 고통을 받았다.

브라질은 사람이 항상 부족했고 더군다나 여자는 없었다. 가장을 꾸린다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야심의 남자들은 가정보다 왕국을 꾸리고 싶어 했다. 아버지나 남편이 되기보다는 새로운 지역의 왕이 되고 싶어 했다.

왕이 되고자 하는 이 혼란스러운 질서에서 브라질이랑 땅은 바로 당장 이익을 뽑아야 하는 곳이 되었고 아프리카에서 강제적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그것의 희생이 되었다.

그래서 바로 지금의 이익이 중요했다. 다음 세대의 가치나 미래를 위한 전략은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포르투갈의 왕실도 마찬가지이었다. 
 

노예제는 300년이 넘게 지속하였다. 그리고 노예의 소유는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널리 유행이 되었다. 농장주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관공서, 군대에서도 노예를 소유했고, 일반 가정, 술집, 가게, 공장에서도 모두 노예를 소유했다.

브라질에서 생산되고 소비되고 수출된 것은 전부 노예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사탕수수를 수확하고 그것으로 설탕을 만드는 것, 그 설탕을 나르는 것도 모두 노예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금광에서 금, 다이아몬드 등의 광물을 캐고, 담배나 카카오를 재배하고 수확하고 면화 등의 작물도 그러했다. 그리고 이런 것은 모두 수출이 되었다. 

흑인 노예의 손에서 식민지 브라질의 모든 산업과 경제가 돌아갔다. 

사탕수수 농업 같은 핵심 산업뿐 아니라 모든 일이 흑인 노예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집을 짓는 것도 길을 만드는 공사를 하는 것도, 집 안을 청소하고 가축을 기르는 일도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도 흑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그리고 그 음식으로 싼 똥을 치우는 것도 모두 흑인의 몫이었다. 

어찌 보면 브라질의 역사는 카브랄의 브라질에 도착한 이후가 아니라 아프리카 흑인이 브라질 도착한 것이 진정한 브라질 역사의 시작이 될지 모른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주인의 집에서 떨어진 '센젤라'라 불리는 공통의 움막 같은 집에서 살았다. 주인들은 이들이 함께 행동하는 것이 두려워서 다른 부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섞어 두었다.

하지만 이 센젤라를 바탕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는 지속해나갔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존재했던 다양한 가족 형태를 재구성했고 다양한 부족의 문화는 나름대로 방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렇게 그들은 아프리카식의 브라질 문화를 만들어나갔다. 


흑인 노예들의 저항은 빈번해져 갔다. 주인 몰래 혹은 주인을 해하고 그들의 해방구로 도망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구는 브라질 전역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주인에 대항하는 폭동도 다반사로 일어났고 더 크게는 반란과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브라질 당국과 주인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이 점점 더 심해졌다. 



엉덩이


브라질은 해변은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하다. 찬란한 태양, 넓은 백사장, 열대 기후, 초록의 바다 등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하지만 브라질의 해변이 더욱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바로 활기찬 해변 문화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그런 해변이 나오면 어김없이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축구를 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또 어김없이 나오는 것이 비키니의 여인들이다. 

해변의 비키니는 몸을 최대한 드러내는 것이 미덕인양 아주 작다. 특히 엉덩이 부분은 티팬티로 거의 훤히 드러나 있다. 얇을 대로 얇아진 그것을 브라질 사람들은 ‘치실(Fio dental 이빨 사이를 청소하는 얇은 실)'이라고 부른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브라질 해변에서 원피스 수영복이나 혹은 엉덩이가 다 덥힌 비키니를 입는 것은 마치 팬티를 입고 목욕탕 안에 들어가는 어색한 느낌이다.


<브라질 해변의 남녀노소>


 브라질 문화에서 엉덩이는 가장 중요한 아름다움이다. 엉덩이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곳의 여자들에게 쫄바지 혹은 레깅스는 가장 흔한 옷 중의 하나이다. 모델들의 가장 흔한 자세는 엉덩이가 가장 보기 좋게 위치하도록 뒤로 돌아서서, 뒤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자세이다. 이런 브라질의 엉덩이에 대한 사랑은 곧 미스 붐붐(붐붐은 엉덩이의 애칭)이란 엉덩이 미인을 뽑는 대회로 이어진다. 그리고 브라질 여인들은 아름다운 엉덩이를 가지기 위해서 많은 비용의 지불을 마다하지 않는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사용하는 포르투갈어와 포르투갈에서 사용하는 포르투갈어에는 좀 차이가 있다. 그건 브라질에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인디오, 아프리카인들이 섞여 있어서, 그들의 언어가 포르투갈어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브라질 포르투갈어'로 나누어서 말하기도 하고, 그냥 ‘브라질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브라질 포르투갈어로 엉덩이를 ‘분다bunda'라고 말한다. 그런데 포르투갈의 포르투갈어로는 엉덩이를 보통 ‘트라제이루Traseiro'라고 한다. 브라질 포르투갈어의 이 ‘분다'라는 말은 아프리카에서 왔다. 아프리카 민족 중에서도 반투족의 낌분두 말이었다. 


 사실 아프리카에서 브라질로 건너온 아프리카인들의 다양한 민족과 부족 출신들이고 또한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를 크게 나누자면 두 민족으로 나누어진다. 바로 반투족과 요루바족이다. 반투족은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 지금의 콩고와 앙골라가 위치한 지역에서 왔는데, '낌분두(quimbundo)'란 언어군을 사용했다. 그리고 요루바족은  적도 부근 서쪽, 지금의 베닌, 기니 그리고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들에 해당하는 곳에서 왔으며, 보통 '과(kwa)'란 언어군을 사용했다. 반투족이 요루바족보다 훨씬 더 많이 와서 브라질 각 지역에 분포했고, 요루바족은 주로 바이아 지방에 머물렀다. 요루바족의 언어는 주로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종교 깐돔블레나 전설 등에서 볼 수 있고, 반투족의 킴분두말은 브라질 포르투갈어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깐돔블레는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종교의 이름이다. 이 종교를 다른 말로 마쿰바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쿰바'란 호칭에는 약간 비하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보통 바이아에서는 마쿰바라 부르지 않고 깐돔블레라 부르고, 다른 지역에는 둘을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고된 노동이 끝나고 밤이 되면 주인이 잠드는 시간 몰래 이 깐돔블레 의식을 치렀다. 이 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육체는 브라질에 있지만 그들의 영혼은 아프리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제물을 마치고 북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현실을 잊고 영혼을 정화했다. 이러한 몰입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밤이면 그들은 그들의 축제를 지속했다. 실제로 깐돔블레 종교의식을 그들은 축제라고 부른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죽음에 아주 가까운 고통으로부터 삶과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이들은 현실의 고통을 그들의 문화로써 이겨나갔다.   

 한편, 주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힘든 노동을 하고 나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질 것 같은데, 잠도 안 자고 밤새 무언가 지지고 볶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용인한 이유는 그것이 생산성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의식을 치른 다음 날이면 노예들은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인으로선 그들이 우울하게 지내거나 혹은 고된 노동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다.


<한밤중에 거리의 파티, 삼바 타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브라질은 아프리카보다 아프리카 문화가 잘 보존되고 융성한 곳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예 제도의 슬픈 현실에서 기인했다. 비상식적으로 고된 노동으로 아프리카에서 온 많은 노예의 삶은 이내 소진되었고, 아프리카 문화의 기억을 생생히 간직한 새로운 노예들이 끊임없이 브라질로 왔다. 또한, 브라질은 가장 늦게 노예 해방이 된 나라이다. 즉 아프리카에서 비교적 최근까지 계속해서 브라질로 유입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프리카 문화는 거의 모든 브라질 문화라고 불리는 것들의 근간이 되었다. 그 문화는 현재 삼바, 까뽀에이라, 깐돔블레, 카니발 등으로 브라질의 전통문화가 되었다. 

 특히 주말이 되면 브라질 사람들은 밤새도록 축제를 계속하는데 그것은 과거의 밤에 주인 몰래 계속했던 축제의 디엔에이 DNA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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