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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철 Jan 12. 2019

<칼라 오브 브라질>  
04. 유럽의 브라질

영국에 보여주기 위해서


농담하기 좋아하는 브라질 사람들은 말도 보통 표준 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관용어구와 비속어 등이 동원이 된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도중에 많은 동물이 튀어나오고 많은 과일과 많은 사람이 튀어나온다. 많은 방망이가 튀어나오고 자신도 모르는 뜻의 말이 마구마구 튀어나온다. 하기야 누가 정확한 의미와 어법을 생각하면서 말하겠는가? 그저 상황에 맞게 그냥 말하는 것이다.

우리도 "얼씨구"란 말의 뜻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것의? 가 붙었을 때 혹은 ~! 가 붙었을 때 의미는 정말 달라진다.

그것은 거시기가 참 거시기한 것처럼 많은 말들이 말과 말의 꼬리를 물면서 삶의 재미를 더해준다.

물론 해학적인 의미의 말도 있지만 비아냥거리거나 뒷담화 같은 이야기를 할 때는 호박씨를 까는 것처럼 많은 의미를 숨기기도 한다. 특히나 많은 성적인 표현들이 서슴지 않고 나온다.


‘영국에 보여주기 위하여'란 말이 있다. 아! 그거~ 그저 영국에 보여주기 위한 거야!"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 말의 의미는 별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보여주기 위한 일을 할 때 사용을 한다. 우리로 치면 '요식적인', '보여주기 식'이란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은 왜 하필 영국일까? 

이 말은 보통 관용적인 의미로 각 나라나 사람들의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한 법률에 기인한다.


18세기 이후 유럽 중심의 세계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였다. 

인간과 철학에 관해서는 계몽주의적인 세계관, 그리고 사회 경제 시스템으로써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오게 하였다. 또한 산업혁명은 이러한 세상의 변화를 더욱 가속시켰다.

절대주의, 중상주의, 왕정, 노예제는 그야말로 과거의 구제였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여전히 이런 구제의 시스템에 의한 국가였다. 

하지만 영국은 계몽주의적 철학을 바탕으로 산업혁명, 자본주의 등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유럽 중심의 세계를 선도에서 이끌었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노예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주 비생산적인 노동이었다. 노동을 해봤자 아무런 재산을 얻지 못하는 노예에 비교해 노동을 통해 재산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유노동자는 훨씬 질 높은 노동을 할 수 있었고 이는 더 큰 생산성을 가져왔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에 많은 것들이 기계의 노동으로 전환되던 때에 생산적인 임금노동자가 훨씬 더 필요하였다. 


또한 세상의 주체에 대한 생각이 신이나 왕에서 인간으로 바뀌었다. 신의 피조물이라는 인간이, 왕의 신하라는 인간이, 이제는 자신의 권리를 가지는 인간 중심적이고 인도적인 생각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성경 혹은 왕의 명령 대신 헌법을 삶이 살아가는 제도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노예제 같은 잔인한 제도는 철폐되어야 한 하는 구시대의 제도였다.

인간 중심의 계몽주의적 철학은 생각을 발전시켰고 이런 생각은 세상을 발전하는 원동력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영국은 이런 패러다임을 주도했고 당시의 세계의 최강국이 되었다. 


한때 대항해시대, 해양제국을 이끌었던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는 약소국으로 추락했다. 

포르투갈의 경제는 모두 식민지 수탈에 의존했다. 그렇게 가져온 금은보화를 국내에 투자하지 않았고 국내 산업에 역점을 두지 않았다. 국내 산업은 자연적으로 취약해지고 더욱더 투자가 안 되는 악순환 속에 포르투갈은 점점 더 약소국의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점점 유럽에서 힘을 잃어가던 포르투갈은 많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영국은 정치적인 보호를 해주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다양한 이익을 제공해주어야 했다.


과거 우리의 구한말 시대에 우리가 강대국의 사이에서 주체적인 결정을 하지 못했었던 것처럼 포르투갈 역시 이런 상황에서 어쩔 줄 모르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쇄국정책을 펼치다가 강대국의 압력, 특히 일본의 압력으로 개항을 했던 것 포르투갈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브라질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식민지 브라질에서는 모든 무역과 모든 왕래는 오직 포르투갈과 해야 만 했다. 그래서 브라질의 항구는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위해서만 존재했었다. 

마침내 1805년 개항이 이루어졌다. 사실상 그 개항은 영국을 위한 것이었다. 이미 브라질에서는 영국과의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이런 개항은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이런 밀무역을 합법화해서 세금을 더욱 거두어 드릴 수가 있었고 영국은 자신의 물건을 더욱 수출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영국은 전 세계에 노예제 폐지의 압력을 행사하였다. 노예제는 인도적으로 잔인하고 불합리한 제도일 뿐 아니라,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의 시장경제에서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세계 최대 노예 수입국인 브라질은 이런 압박에 목표가 되었다. 

브라질에서 노예제 폐지에 관련된 조항은 모두 영국의 압력과 관련이 있었다. 직접 영국은 포르투갈 그리고 식민지 브라질과 다양한 노예제 폐지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영국은 브라질 영해 내에서 노예무역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감시하고 수색하는 권리를 브라질로부터 받아내는 협정을 맺기도 했다. 

결국, 1831년, 영국의 압력으로 노예제 폐지에 앞서서 브라질 의회는 노예 수입 금지 법안은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서 어떤 형태의 노예 수입도 금하도록 했고, 불법으로 노예가 수입되었을 경우 다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보장했다. 한마디로 노예를 더 수입하지 않겠다는 법안이었다. 



<아름답고 멋지기로 유명한 뽀르뚜 까링냐>


브라질 북동부의 페르남부쿠에는 '닭의 항구’라 불리는 해변, '쁘라이야 지 뽀르뚜 가링냐스 praia de porto garinhas'란 곳이 있다. 이곳은 유명한 관광지로 아름다운 청록색 물빛의 해변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우리가 흔히 텔레비전이나 사진에서 보던 푸른빛 열대 바다 말이다.


이 아름답고 멋진 해변의 이름이 '닭의 항구'가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노예 수입 금지 법안이 시행되었을 때 이곳에서 불법으로 노예를 수입했는데, 이것을 위장하기 위해 닭의 상자 아래로 노예를 숨겨서 들여왔다. 이렇게 해서 노예가 항구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항구에 새로운 닭이 왔어요~!"라고 하면서 노예 수입의 사실을 알렸다. 

이런 식으로 많은 노예 수입금지 법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곳에서는 여전히 불법적으로 노예 수입을 계속했다. 노예 수입금지 법안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사실 브라질 정부는 이런 법안을 적극적으로 시행할 의지가 별로 없었다. 이런 법이야 그저 강대국 '영국에게 보이기 위한'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이 법안으로‘영국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란 말이 생겼다.



자징 보따니꾸 - 식물원


리오 데 자네이루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식물원이 있는 '자징 보타니쿠' 란 지역이 있다. 

자징 보따니꾸는 바로 식물원이란 뜻이다. 이곳에는 정말 다양한 식물과 작물 등이 있는 거대한 정원이자 공원이다. 이곳은 국립 식물원인데 이국적인 식물들 사이로 이 정원을 걸어가다 보면 도시와는 다른 세상에 산책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것에는 별의별 식물들이 특히 열대의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걷다 보면 우리의 수목원과는 다른 특유의 열대의 수목원의 이국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이 자징 보따니꾸에는 브라질이 자랑하는 보사노바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줄여서 톰 조빔의 기념관이자 극장이 있다. 에스빠소 톰 조빔, 말하자면 톰 조빔 스페이스라고 불리는 이곳이 자징 보따니꾸에 있는 이유는 그가 유독 이곳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을 걸으면서 수많은 음악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나중에 이곳에 집을 지어서 살기도 하였다. 그러니깐 이곳의 그의 음악 영감의 토양이 되는 셈이다.


이곳에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좀 더 여유 넘치는, 보사노바다운 길로 걸어 가볼 수 있다. 보사노바 음악의 해변이라 할 수 있는 이빠네마 해변을 지나 그 뒤에는 라고아라는 호수가 있다. 사실 라고아는 그저 호수란 뜻이고 이 호수의 이름은 호드리고 지 페이타스이다. (호드리고 지 페이타스는 아주 옛날 이 지역의 거대한 대토지 지주였다) 그냥 모두가 그저 라고아라고 부른다. 만일 이곳을 걸을 때가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이곳에서 브라질에서 가장 큰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수도 있다.

이 호수는 말하자면 경마장 가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서 말 경주 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옆에 바로 자징 보따니꾸가 있다.


이 식물원이 만들어진 것은 1805년에 있던 개항과 관련이 있다. 식민시대의 브라질에서는 실제로 처음으로 이루어진 개항 이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포르투갈 외의 다른 나라의 물건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외국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예전의 식민지 브라질을 구성했던 포르투갈 사람도 아니고 아프리카 사람도 아닌 다른 나라의 사람의 이민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이 첫 번째 이민자들은 다름 아닌 바로 마카오 출신의 중국인들이었다. 이 이민자를 받아들인 목적이 있는데, 바로 차를 재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처음으로 차 재배를 시작하게 한 땅이 바로 지금의 자징 보따니꾸이다. 그 뒤 이곳에서는 다양한 식물의 재배를 위해서 심어졌고 지금의 식물원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브라질의 이민은 광활한 토지를 개간하는 농업의 이민을 받아들였다. 하기야 당신 산업은 곧 농업이었으니까 땅을 개간하는 것이 모든 산업의 기본이 되는 셈이다.

스위스의 이민자와 독일의 이민자가 입국하였는데 이들은 프리프르그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땅을 개간하고 그들의 정착촌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노바 프리부르그 즉 새로운(신) 프리부르그란 이름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독일계의 이민자를 받아들인 이유는 당시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이후라서 포르투갈 이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당시의 왕인 동 페드로 1세의 부인은 도나 레오폴디나였는데 이 부인이 바로 독일계인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영국에게 보여주기 위한 법인 노예 수입금지 법안이 통과된 후 브라질은 진지하게 노예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노동을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의 해결로 이민을 생각하였다.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의 이민자들이 거대한 브라질 땅을 개간하고 새로운 농업을 하기 위해서 들어왔다. 새 술을 새 부대에서 담근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들은 새로운 땅인 남부지역으로 갔다. 북부지역보다 남부지역은 상대적으로 개간할 수 있는 땅이 많았다. 그래서 브라질 당국은 남부를 개발하기 위해 이민자들에게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남부의 기후는 유럽의 기후와 가장 가까웠다.

이들은 주로 남부 지역인 히우 그란지 두 수, 산타 카타리나, 파라나 지역에서 그들의 새로운 정착촌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정착촌은 현재의 주요 지역과 도시로 바뀌었고 그 지역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런 유럽의 이민은 계속해서 증가하였고 특히 노예 해방이 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런 이민자들은 과거의 브라질과는 새로운 브라질을 건설했다.

초기 농업 이민으로 시작한 이민자들은 농업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브라질을 만들어 나갔다.


현대 음악가 한스 조아킴 코엘료이터,Hans-Joachim Koellreutter란 사람도 독일에서 이민 온 사람이다. 그는 바로 톰 조빔의 음악 선생님이었는데 톰 조빔은 그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음악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를 통해서 톰 조빔은 유럽 음악의 소양을 자신의 브라질 음악에 접합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많은 작곡을 한 보사노바 음악에서 보인다.



<자징 보타니꾸와 코르코바두 산의 예수상>

이곳 보타니쿠 정원에서는 코르코바두 산의 정상에서 이 도시를 두 팔로 감싸고 있는 듯한 그 유명한 예수상이 한눈에 보인다. 


어쩌면 톰 조빔의 명곡 '코르코바두'란 노래는 이곳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는 차를 타고 이곳에 다니는 것도 좋아했는데, 이곳의 생태적인 환경과 어울리지 않게 차 안에 에어컨을 틀어놓고 이곳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쩌면 코르코바두란 노래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차 안에서 차창 밖에 보이는 코르코바두산의 예수상을 보고 만들었는지 모른다.

이런 복합적인 음악의 교류와 영감 속에 그는 수많은 보사노바 명곡을 작곡했다.



5월 13일


브라질 역사 중에 가장 커다란 사건이 있는 날을 뽑으라면 바로 우리가 올림픽을 열기 딱 100년 전인 1888년 5월 13일을 뽑을 수 있겠다. 

바로 그날이 황금 법이라고 불리는 노예 해방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계 최대의 노예 수입국인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늦게 노예 해방이 이룬 나라가 되었다. 이 노예 해방으로 브라질 사회는 근본적으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


노예 해방은 브라질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였다. 노예 해방론자와 노예제를 유지하자는 쪽이 대립했지만, 누구도 선뜻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브라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예제가 있는 나라가 되었고 국내의 논란뿐 아니라 세계적인 비난도 지속했다.

사실 과거 농업과 광업, 즉 사탕수수 생산과 금 등의 광물 채광에 의존했던 브라질에서 노예제는 산업의 근간이었다. 당장 노예가 없으면 누가 일을 하고 누가 생산을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국내외에서 노예제 폐지에 압력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커피 산업이 커지자 많은 것이 큰 변화가 일어났다.

브라질의 대세는 커피가 되었다. 브라질의 산업의 주도권은 사탕수수의 바이아, 금광의 미나스 제라이스에서부터 상파울루의 커피로 넘어왔다.

과거의 산업은 주인과 노예들로 이루어진 농장에서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커피 산업은 양상이 달랐다. 커피는 문화가 있었고 이런 문화가 생활(습관)이 되면서 폭발력은 커졌다.

커피는 도시와 함께 성장했으며 도시적인 자본과 결탁했다. 그래서 커피와 함께 커피 부르주아들이 탄생했다. 

커피는 기본적으로 노예들의 노동으로 성장을 했지만 노예 노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커피의 수확은 단순히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커피의 열매를 감별해서 수확해야 하는데, 자발성이 없는 노예 노동으로는 거의 불가능했고 오히려 임금노동자들이 훨씬 생산성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혁신적인 기계 ‘커피 탈곡기’의 발명은 노동의 주체와 노동의 감독으로서 역할에 변화를 가져왔다.


브라질에서는 다방면으로 노예 폐지에 대해 움직임이 거세졌다.

브라질의 시인 카스트로 알비스는 노예 제도에 반하는 여러 편의 시를 썼으며, ‘노예들의 시인’이란 별명도 얻었다.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감상적인 어조로 묘사한 그의 시들은 사람들의 가슴에 인도주의의 불빛을 밝혔다. 많은 정치가와 문인, 예술가, 시민들이 비인간적인 노예제의 폐지에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너무 많은 노예 인구가 유입되어서 브라질이 아프리카화 되어간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들은 노예 수입을 폐지하고 유럽에서 이민을 많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라질의 설탕 산업 경쟁국인 아이티에서는 일찍이 노예 반란이 성공을 거두어 독립된 정부가 들어섰는데, 이는 브라질의 아프리카화를 더욱 우려하게끔 하였다.


현실적으로 노예 수는 너무 많았고, 브라질 산업 전반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노예 해방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점진적으로 노예 해방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졌다. 1869년 노예 매매 시 15세 미만의 어린 자녀는 부모와 함께 하는 것을 명시하는 법률을 만들었고 이 년 뒤 노예에서 태어난 자는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라는 법을 제정했다.

노예 제도에 관한 법률이 여러 차례 개정되고 커다란 사회 반향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노예제 폐지는 뜨거운 감자였다. 어떤 통치자도 노예 해방에 대한 말을 아꼈다. 그렇다고 구시대적인 노예제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당시 통치자 페드루 2세가 유럽을 여행하는 사이 그녀의 딸 이사벨 공주님은 '황금 법'이라 불리는 노예 폐지 법안에 도장을 찍어버렸다. 


<당시 황금 법 공표의 날인 1888년 5월 13일의 사진과 신문기사>

그렇게 갑자기 1888년 5월 13일 노예 해방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이 황금 법을 축하하며 해방의 날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브라질의 대표적인 소설가 마샤두 지 아시스는 이 황금 법 공표의 날을 자기가 생전에 본 최대의 대중적인 열광이라고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갑자기 브라질에서 거의 반수를 차지하는 인구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노동이었다. 언제나 브라질의 노동력을 담당했던 노예를 대신할 노동력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카니발과 공산주의자


브라질 도시에는 특유의 냄새와 소리가 있다. 이른 아침이면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버스의 기계적인 거친 엔진 소리, 길거리에서 은근하게 풍기는 가스 냄새. 저녁이 되면 동네에서 떠들썩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그리고 더운 여름을 식혀줄 맥주 냄새. 그리고 축제의 뒤편에는 오줌 냄새.


이런 하루하루가 느껴지는 일상이 있는가 하면 시즌별 달라지는 느낌도 있다. 우리는 사계절이 분명해서 단 하루 사이에 그런 계절이 변화되는 느낌을 주는 때가 있다. 보통 봄비가 내리고 갑자기 따뜻한 날이 되었거나 호빵 광고가 나오면 이제 겨울이 되었구나 하고 느낀다. 그러면 옷차림도 그렇고 도시의 공기도 달라진다.

브라질 역시 1년이 우리와 같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되어있다. 하지만 그냥 1년이 여름 같다.

브라질에서 시즌의 변화는 날씨나 온도보다는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카니발이다.

카니발이 다가오면 도시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광고판들은 모두 카니발에 관련된 광고로 바뀐다. 

특히 글로보 방송국에서는 그들의 카니발 테마송 ‘글로벨레자’가 나오면 ‘아! 이제 카니발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오세요, 오세요. 행복해지기 위해서~’란 노래가 흘러나오고 아름다운 여자가 반라로 춤을 추는 텔레비전 광고가 나오면 모두 카니발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노래와 이 광고만 나오면 왠지 행복해지고 어서 카니발이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간혹 가다가 이런 텔레비전의 거대한 신호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최면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시는 카니발 시즌에 맞게 다시 세팅된다. 물론 동네도 훨씬 더 신나고 흥겨워진다. 


<카니발 때가 다가오면 광고판도 카니발에 맞게 바뀐다. 바이아 카니발 음악의 여왕이라 할 수 있는 이베치 상갈로가 모델로 등장한 대형마트 광고>


한국에서 아시는 분이 카니발 사진을 찍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그분이 지낼만한 곳을 찾기 위해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부동산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은 우리로 치면 '벼룩시장' 같은 신문이나 혹은 자신의 집이나 전봇대 같은 곳에 세를 주는 것을 알려준다. 한 곳에서 '카니발 기간 세줌'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발길을 멈추니 그 집 앞에 앉아 있던 주인이 말을 건다. 


“봉 지아(좋은 아침)~ 뚜두 벵(잘지내)?"

그러고는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니 북쪽이나 남쪽이냐 하고 묻는다.

나는 남쪽이라고 했더니 자신은 북쪽이 좋다고 한다.

왜 그러냐 하고 하니깐 또렷한 브라질식 발음으로 낑 중기일(김정일)이 미국과 맞짱을 떠서 좋다고 한다. 그러고는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고 소개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공산주의자의 이력은 집안 내력이라고 소개를 해주었다.

그의 이름은 필리포였다. 자신의 집은 아주 옛날에 이탈리아에서 이민을 왔는데 이민을 와서도 공산주의자였다고 자신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서 나는 본론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카니발 기간 집을 세놓았는지는 물어보았고 집의 상태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월세를 물어보았는데 금액이 너무 비쌌다.

그래서 나는 "이봐 공산주의자, 월세가 너무 자본적인데!"하고 물어보자 그는 대답했다. 카니발이잖아~ 카니발은 다 거꾸로 하는 거라고!"


덕분에 나는 그의 집을 둘러보고 또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아주 오래된 사진이나 여러 기념품에서 이탈리아의 정취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특히나 20세기 초반에 브라질의 노동조합이나 다양한 사회운동에 유럽의 이민자들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이민자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브라질로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부심 있게 해 주었다.


필리포는 선조는 이탈리아에서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삶을 찾겠다'라는 희망을 품고 브라질로 건너왔다. 브라질은 정말 많은 이민자를 유럽에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런 유럽의 대량 이민은 브라질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가장 많은 이민을 한 국가는 이탈리아였고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폴란드 등 다양한 유럽 국가에서 4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브라질에 이민을 왔다. 

유럽 이민의 가장 활발하던 때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로, 약 30년의 세월 동안 브라질에 입국한 외국인 수는 약 380만 명에 달한다. 특히 1887년부터 1914년까지 기간 동안 274만 명에 달한다. 이런 이민은 계속되었다.

1930년대는 대규모의 일본 이민자들이, 우리나라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큰 이민을 차지하였다.


이런 대량 이민은 과거의 브라질과는 다른 새로운 브라질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유럽발의 대량 이민자들은 주로 남부의 농업과 상파울루의 커피 농장에 그리고 대도시에 집중이 되었다.

브라질의 대량 이민이 시작된 이유는 드넓은 땅에 비해서 이것을 개간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인식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브라질은 그 방대한 땅에 비교해서 인구의 수가 항상 적었다.

특히 노예 해방 이후 노예 노동을 대신할 노동력 확보가 필요했다. 점점 더 상파울루의 커피 농장과 커피 산업은 확대되었고 더욱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이것을 충당하기 위해서 유럽의 이민을 장려했으며 이를 위해서 다양한 인센티브와 보조금이 지원되었다.

유럽의 사람들에게도 브라질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그래서 많은 유럽 사람들이 부푼 꿈을 않고 대서양 횡단해서 브라질의 땅으로 이주를 했다.


노예 해방은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노예 해방 이후 군주제는 무너지고 새로운 공화정이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브라질의 엘리트들이 브라질의 지배적인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당시 이들은 실증주의 철학이 가장 주요한 통치 이념이었다. 이들이 걱정 중의 하나는 브라질이 점점 검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윈의 진화론 이후 당시 인종론이 과학적으로 우생학이 받아들였다. 그들의 실증적인 과학적인 논점에서 검어진다는 것은 열등한 것이고 하얘진다는 것은 우등한 문제였다. 브라질 국기에 쓰여 있는 질서와 진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유럽 인종처럼 브라질이 백인 국가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의 이민을 장려했다. 유럽의 사람들이 브라질에 와서 살면서 인구를 늘이거나 혼종을 한다면 브라질은 점점 더 하얀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사실 브라질의 노동력 부족의 문제는 사실 흑인 노예를 임금노동자로 전환한다거나 혹은 북동부 쪽에 남는 노동력을 상파울루 등에 이주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노예 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북동부의 설탕 산업과 많은 농장은 노예 해방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자유의 몸이 된 많은 노예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서 이주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통념과 인종에 대한 편견 역시 새로운 유럽 이민을 더욱 확대시켰다.


이런 이민은 특히나 도시 상파울루를 크게 발전시켰다. 도시로 유입된 이민자들은 이태리 장인이라 불리는 건축가, 수공업자, 작은 공장, 다양한 상점 그리고 전문직 종사자로 일을 하면서 도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렇게 도시는 발전되고 이들은 브라질의 중산층이 되었다.

상파울루 도시는 커피 농장을 시작으로 커피 자본 그리고 이민자와 함께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이런 유럽의 이민자들의 후손은 지금의 브라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여러 방면에서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활동하고 있다. 브라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지우마 호세프 역시 불가리아 이민자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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