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말이야 최영의란 분이 계셨어. 최영의. 전 세계를 상대로 맞짱을 뜨신 분이지."
한국 영화에서 기억에 남을 바로 이 장면으로 배우 송강호는 무명 배우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예전에 말이야~"하고 말하는 바로 이 장면은 너무나 강인해서 나오자마자 바로 전설의 반열이 되었다.
그가 이야기한 최영희는 최배달로 불리는 무술인이었다. 그는 극진 공수도의 창시자였고 일본에서 활동한 무술인이었다. 영화에서처럼 그는 많은 전설적인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소를 맨손으로 때려잡는다던가 동전을 두 손가락으로 구부리는 등의 괴력뿐 아니라 당시 전설적인 파이터라는 이름에 걸맞은 도장 깨기와 해외 격투기 여행 등으로 화려한 전적을 쌓았다.
전설적인 파이터들의 무술 여정은 언제나 영화나 만화의 단골 소재였고 남자들이 꿈꾸는 로망이었다. 많은 무술의 주인공들은 영화나 만화를 통해서 그들의 업적이 더욱더 전설이 되었다.
일본의 카지와라 잇키는 무술 스포츠물의 만화작가로 아주 유명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그리고 현재까지도 가장 인기가 많았던 만화작가였다. 그의 작품의 주제는 항상 근성으로 무장한 불굴의 남자 이야기였다.
20세기 후반의 동양 남자들의 최고의 캐릭터는 바로 이런 근성의 캐릭터였다. 특히 그의 만화는 청소년 남자들에게는 해리포터였다. 그가 만든 캐릭터인 내일의 조, 타이거 마스크와 그가 다시 창조한 실존 인물 김일, 안토니오 이노끼, 왕정치는 바로 마음속의 우상이 되었다. 남자들에게는 이런 근성은 남자들만의 로맨스였다. 그런 상남자가 되고 싶어 했고 그렇게 남자들의 정신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최영의 역시 일본의 스포츠, 무술 만화의 대가이자 정점이었던 카지와라 잇키의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한국판은 무한의 파이터)”의 주인공이었다. 만화는 대성공이었고 그는 일약 슈퍼스타가 되었다. 사실 최영의는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는 무술인으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만화로 인해서 일본에서는 아주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만화에서 그는 일본인으로 나온다. 카지와라 잇키라는 작가는 부정적인 사생활과 군국적인 사고방식 등으로 그리 기분 좋게 이야기할 사람은 분명히 아니다.
이런 만화 부류의 무술 스포츠 근성 물에서 무엇보다 사람들 특히 동양 남자들이 희열을 느끼는 것은 동양인이 세계를 상대로 맞짱을 뜬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동양 사람들이 가지는 자의든 타의든 간의 콤플렉스, 왜소하고 약한 것에 대한 이미지를 통쾌하게 부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홀연 단신으로 전 세계의 상남자와 결투를 벌인다는 것, 그것도 실존하는 이야기라는 것은 남자의 가슴을 흥분시키는 이야기였다. 거기다가 돈과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의 약속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만큼 멋진 일은 없었다.
홀연히 나타나서 홀연히 사라지는 이런 전설들의 이야기는 많은 남자를 몰래 울게 했다. (어쩌면 모든 남자는 만성 중2병을 앓고 있다.)
마에다 미츠요는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유도인이었다. 이 사람은 유도의 기술로 전 세계로 대결을 하러 돌아다닌 사람의 시초였다. 그는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의 무술인, 싸움꾼을 상대로 많은 에피소드와 전설을 남기며 돌아다녔다. 그는 유럽에서 코마 백작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쿠바와 멕시코 중남미까지도 진출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무술 격투 세계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로써 브라질로 갔다. 그는 멕시코 페루 등의 남미의 무술인들을 다 바닥으로 꽂아버리고 아르헨티나를 거쳐서 브라질의 남부 도시 포르투 알레그리에 도착했다. 그는 브라질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의 유도를 브라질 사람들에게 선보였으며 많은 대결 이벤트를 만들었다. 전설적인 17대 1의 대결뿐 아니라 구경 온 모든 관중과 대결해서 홀로 우뚝 선 모습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이미 브라질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브라질 남부에서 시작해서 북부의 마나우스와 벨렝까지 도달했다. 당시의 브라질 고무산업은 초전성기였기 때문에 고무 생산지 아마존의 도시들인 북부의 마나우스와 벨렝은 화려한 도시와 부자 도시의 면모를 세상에 보여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정착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사랑 -그는 전 부인과는 사별했다.- 브라질 여자 마이 이리스를 만났고 죽을 때까지 그녀와 벨렝에서 살았다.
그는 브라질에서 그의 유도를 선보였고 그의 유도장을 설립했다.
그는 유도라는 이름 대신에 유술이란 이름으로 자신만의 유도를 가르쳤다. 아마 ‘도’라는 의미보다 실전에서의 자기 방어와 무술에 측면을 더욱 강조했기 때문에 ‘술’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듯싶다.
그래서 원어로 유도라는 주도 대신 유술이란 주짓수란 말이 사용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종격투기로 명망이 생긴, 안드레이 실바와 주제 알도의 나라의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원형이 되었다.
그는 주짓수를 가르치고 또 많은 대결의 이벤트도 진행했지만, 일본의 브라질 이민 사업의 일에도 열성이었다. 이미 많은 명망을 얻은 그는 일본의 브라질 이민 사업에도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일본의 브라질 이민은 1908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이민이 아주 예전부터 시작된 이유는 바로 우리의 땅에서 일어난 전쟁 우리에게는 비참한 역사였던 러일 전쟁이 그 이유가 되었다.
이 러일 전쟁으로 일본은 승전국이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중에서 농촌이 피폐해졌다.
특히 많은 인구와 그로 인한 식량난이 대두되자 이런 농촌들을 우선으로 해외의 이민을 장려했다. 이민은 농촌에서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농업 이민이 주로 이루었다. 결국, 하와이의 농촌 이민을 시작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
브라질에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럽 사람들의 이민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큰 꿈을 않고 브라질로 온 많은 사람이 브라질의 환경에 어려움을 느껴서 다시 돌아갔고 유럽에는 브라질 이민에 회의적인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브라질 이민의 가장 큰 숫자를 차지하던 이탈리아는 상파울루 커피 농장의 이민을 위한 보조금 정책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유럽 사람의 브라질 이민은 대폭 감소했다.
거기에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유럽은 이민은 급감했다.
이에 브라질 정부는 유럽의 농업 노동력을 대체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특히 커피 산업이 계속해서 확장돼가던 상파울루 지역이 특히나 이민 노동력이 필요했다.
일본의 해외 이민 상황과 맞아떨어진 브라질은 이렇게 해서 대거 일본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상파울루 커피 농장을 시작으로 브라질의 다양한 농장으로 일본인 이민자가 진출했다. 특히 북부의 파라주의 농장은 일본의 브라질 이민의 큰 축을 담당했다.
아마존 주변의 북부지역은 고무산업의 재원으로 개발을 시작하였으나 고무산업이 급격하게 하향 산업으로 들어서자 주위의 농장의 농업 산업을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개발되는 농장들에 대한 사업에 일본 이민자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브라질은 연합국 편에 섰다. 일본과는 적이 되었고 국교는 단절되었다. 당연히 그 당시에는 이민은 허가가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일본은 전 세계로 100만 명의 이민 인구가 있었고 그중 25만 명은 브라질에 있었다.
현재는 250만 정도 일본계가 해외에 거주하는데 브라질에서만 150만 명의 일본계가 거주하고 있다. 벌써 반이 훨씬 넘는 숫자이다. 그러니깐 해외에서 브라질은 일본계가 가장 많은 곳이다.
현재 일본에 사는 브라질계 인구는 한국계, 중국계 다음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프로레슬링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름 안토니오 이노끼는 일본으로 다시 귀환한 브라질계 일본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전설적인 레슬러, 박치기의 제왕인 김일 선수의 대결로 유명했던 그는 자기 이름 안토니오에서 알 수 있듯 브라질계 일본인이다.
안토니오 이노끼가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계 전설적인 레슬러 역도산을 브라질에서 1950년대에 만나면서부터이다. 역도산은 브라질로 ‘발리뚜두’의 경기를 하러 갔고 그곳에서 안토니오 이노끼를 만났다.
아마도 일본에서 멀고 먼 나라 브라질은 세상의 끝이었고 그곳은 마치 게임에서 미지의 만랩의 대마왕 같은 이미지의 선수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언제나 무술과 격투의 경기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았다. 당시 일본은 레슬링이 유행이 시작되었고, 브라질에는 발리뚜두가 유행을 하였다. 지금의 MMA, UFC 등의 이종 격투기 경기의 원형은 발리뚜두(Vale Tudo), 말 그대로 모든 무술과 기술이 허용되는 경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역도산은 안토니오 이노끼를 일본으로 데리고 와서 프로레슬러로 데뷔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에서 60년대 프로레슬링의 대성공을 맞이했다. 당시 프로레슬링은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기였다. 그는 후에 일본의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브라질의 일본계가 일본으로의 역이민은 1980년대부터 점차 가파르게 상승했다. 당시 일본은 전쟁의 상처를 훨씬 넘어서는 고도 발전으로 경제가 호황이었지만 반대로 브라질은 초인플레이션 등으로 경제가 어려움에 부닥쳤다. 그래서 많은 일본 이민자는 브라질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또한 외국인 노동력이 필요했던 일본 정부는 입국관리법을 개정해서 3세의 일본의 브라질인들에게 자유롭게 일본으로 입국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많은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일본으로 입국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들은 일본 사람처럼 보이지만 일본문화와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적응 등의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닛케이 진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일본은
그들에게 지팡구가 되지는 못했다. 니케이진들은 주로 3D 업종이나 비정규직의 문제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조선족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그의 부모들이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난 브라질, 그리고 그의 후손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돌아온 일본.
그들은 두 문화와 경제의 정체성과 간극으로 고통받고 있다.
일본에서 브라질로 새로운 삶의 꿈을 찾아서 떠난 일본 이민의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었다. 이민 사업이 한창일 때는 실제로 일본 이민 도시를 만들려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실제로 파라주의 토메 아수 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지팡구의 건설이라는 야심 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런 이민 사업 프로젝트는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유명했던 마에다 미츠요는 이 프로젝트에 많은 일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실제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여전히 그는 브라질 이민 사업에 많은 중요한 일을 담당했고 많은 일본 정착촌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브라질의 일본 이민의 아이콘이 되었고 실제로 브라질로 귀화를 했다. 그는 귀화할 때 이름을 콘지 코마(백작 코마)라고 사용했다.
지역의 이민 사업에는 지역 유지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했는데 그 지역에는 가스따웅 그레시이라는 유지가 있었다. 그의 집안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온 이민자 집안이었다.
그는 지역의 유지이자 정치가였고 백작 코마가 힘쓴 일본인 정착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스따웅 그리시이는 카를로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카를로스는 이 집안의 골칫덩어리였는데, 그는 싸움꾼이었고 집안의 말썽꾸러기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작 코마는 그리시이 집안의 도움에 보답을 하고자 이 말썽꾸러기 싸움꾼에 유술 즉 주짓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서로서로 돕고 서로의 골칫덩어리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이 주짓수는 이 그리시이 집안을 통해서 브라질리언 주짓수로 다시 탄생되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된다.
백작 코마로부터 카를로스가 주짓수를 연마하고 있었을 때 그에게는 꼬꼬마였던 엘리오가 있었다. 이 꼬꼬마는 어깨너머서 그 수련과정을 보면서 자랐다. 하지만 사실 가스땅 그리시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주 왜소하고 조그마하고 허약체질의 꼬꼬마였다. 너무나 허약한 아이여서 그의 집에서는 운동은커녕 무술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야기를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발육의 문제 있고 어지러움을 자주 느끼는 허약한 아이였다. 아무도 그가 자신의 형처럼 이런 무술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이혼을 했다. 그는 형 카를로스와 함께 그의 어머니 세사리나를 따라 자신의 고향을 떠났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아주 멀리 리우 데 자네이루로 이주를 하였다.
그곳 리오에서 카를로스는 이미 유명한 파이터가 되었고 이내 그의 무술 도장을 만들었다. 여전히 엘리오는 형 카를로스의 주짓수를 구경하면서 지냈다. 그는 직접 주짓수를 연마하진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삶이 되었다.
어느 날 그의 형은 급한 일 때문에 그의 동생 엘리오에게 도장을 맡기고 주짓수 수업을 비운 적이 있었다.
그는 그가 평소에 보아왔던 주짓수로 수련생들에게 여러 가지 수련을 해주었는데, 그의 지도는 정말 탁월했고 그 날 이후로 모든 수련생은 그가 계속해서 함께 수련해주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구경만 하던 약골이 가르쳐주는 선생의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묵언 수행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형의 주짓수를 구경만 하면서 그만의 주짓수를 성립시켰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주짓수를 연마하기 시작한 그는 육체적으로 허약하지만, 근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는 이 주짓수를 통해서 그의 두려움과 무서움을 극복했다.
그의 신체적 콤플렉스는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힘이 없거나 작은 사람들도 강해질 수 있는, 자신보다 크고 힘센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무술로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는 넘어져도 바로 반격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곳에서 그는 주짓수를 더욱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브라질의 최고의 파이터가 되었고 또한 많은 파이터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그의 자식들을 최고의 파이터로 수련시켰다.
그리이시 집안은 주짓수와 이종격투기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는 최고의 파이터가 되었을 때도 왜소했다. 그는 수많은 대결에서 딱 두 번 졌다고 알려졌는데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경기, 아마 브라질에서 최고의 대결로 펼쳐졌던 유도 파이터 기무라와의 경기였다. 기무라는 전 세계 최고의 유도 파이터였다. 지금도 현대 유도는 기무라의 전과 기무라의 후로 나눈다고 할 정도의 최고이다.
유도의 최고의 후예와 유술의 최고의 후예들이 경기는 커다란 관심과 많은 설왕설래와 자존심 대결을 가지고 왔다.
원조의 유도와 변형인 유술의 관계, 그들의 스승에 대한 무수한 루머 속에 펼쳐진 이 세계적인 이 대결이 브라질 축구의 성지인 20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 마라까낭 경기장에서 열린 것을 보니 그것의 관심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이날 경기에서 엘리오는 키무라에게 졌다. 하지만 그는 두 팔이 뿌려져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것을 보다 못한 그의 형이 수건을 경기장에 던짐으로 경기는 끝이 났다. 사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브라질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그의 근성은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격투기의 마술로 가져갔다.
발리뚜두, 루따 리브리, MMA, UFC 등 세계적으로 이종 격투기 경기가 체계를 잡고 발전할 때마다 그리이시 가문의 브라질리언 주짓수는 그 중심에 있었다.
현대의 사람들이 이런 격투 경기에 열광하는 것은 단순하게 싸움의 동물적인 쾌감도 있을 수 있지만, 세상과 맞짱을 뜨는 고수 파이터들의 근성과 그것에 담겨있는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자식들과 후손들은 계속해서 전설을 쓰고 있다.
홀스 그리이시, 힉송 그리이시, 호이스 그리이스같은 사람들은 이전의 도장 깨기의 격투 여행, 지금의 UFC 등의 챔피언을 통해 계속해서 최고의 전설 이야기를 쓰고 있다.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가지고 있는 불패의 신비의 무술의 호칭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이종 격투기를 통해서 계속해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