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 데 자네이루의 '벨포르도 호샤의 순수'라는 삼바학교는 2013년 카니발 행진을 학수고대하였다. 그 동네 벨포르두 호샤에 처음 삼바학교가 생긴 이래 2부 리그와 3부 리그를 전전하던 그들이 처음으로 카니발 스페셜 리그에 진출해서 내로라하는 유명 삼바 학교와 챔피언을 겨루게 된 것이다.
벨포르도 호샤는 유명한 삼바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진출한 카니발 스페셜 리그를 화려하게 준비할 스폰서, 즉 큰 손이 필요했다. 당시 한 스폰서와 카니발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것은 상당히 실현 가능성이 큰 것이었다.
주제는 바로 '한강'이었다. 그렇다. 서울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바로 그 한강 말이다. 당시 브라질에 한국 이민이 시작이 된 지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다.
카니발 행진의 화려함과 대규모의 스펙터클은 돈과 비례가 된다. 이 삼바 학교는 어떻게 하든 후원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한국의 스폰서를 잡기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했다.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선조 아프리카의 신들인 오리샤들에게 소원을 성취할 기도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즉 일종의 굿판이 필요했다. 이 삼바학교의 친구 중 하나는 신기로 유명했고, 그들의 애원을 영험하게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신기의 친구는 브라질에 있지 않고 독일에서 아프리카 문화를 공부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당장 전화를 걸어서 "오리샤에게 우리의 부탁을 전해줘~" 부탁을 했고 당장 독일로 건너가서 도시 ‘본’의 한 공원에서 자신들의 염원을 담은 굿판을 펼쳤다. 그곳에서 그들은 카니발에서 한국 문화를 소개하기 위한 스폰서를 잡기위해 아프리카 신들인 오리샤에게 기도했다.
굿판은 성공적이었다. 그 후 그들은 오리샤에게 드리는 음식을 정성껏 놔두고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때 공원 관리인이 그들을 불렀다.
이 독일의 공원 관리인은 친절히 이야기했다. "소풍 음식을 깜박하셨네요~ 여기 가져가세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그들의 정성이 오리샤에게 전달이 되었는지 그들은 한국의 후원자를 붙잡았고 삼바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2013년 카니발 결승리그에서 그들의 화려한 행진을 할 수 있었다.
당시의 주제는 '한강의 7개의 물결 - 브라질의 한국 이민 50주년' 이였다.
2013년 카니발은 한국에 대해 주제를 풍성하게 브라질 사람들에게 알렸다. 상파울루의 또 다른 삼바 학교 '빌라 마리아 연합'은 "메이드 인 코리아"란 주제로 행진을 하였다. 빌라 마리아 연합은 상파울루의 유명한 삼바 학교였다. 당시에 카니발 감독은 쉬코 스피노자였고 그는 아주 유능한 카니발 감독으로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 이들은 2008년 일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라세 마세 100년 이민으로 1000년의 문화와 지혜"라는 카니발 행진으로 3위라는 좋은 결과를 받았었다. 그래서 그들은 2013년에 한국을 주제로 더욱 드라마틱한 일을 기대하였다.
그해에는 브라질과 한국에서 브라질 이민 50주년에 대한 다양한 행사가 많았다.
살바도르의 카니발에서도 싸이가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클라우지아 레이치와 합동으로 카니발 행진 공연을 펼쳤는데 당시 그곳에 있던 모든 브라질 사람들이 강남스타일을 함께 부르면서 말춤을 추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2013년 카니발의 50년 이전인 1963년, 브라질 산투스항에 한배가 도착했다. 이 배는 1962년 12월 18일, 부산항을 출발해 홍콩을 거쳐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 마침내 브라질의 산투스에 도착한 치랭카호였다.
그 배에 있던 17세대 103명의 한국인은 저마다의 드 푸른 꿈을 가진 채 한국보다 100배나 큰, 언제나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브라질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를 시작으로 브라질의 이민이 1960년대에 5차례
진행되었고 약 3000여 명의 사람이 브라질에 이민을 떠났다.
이 이민은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처음 있는 해외 이민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다양한 가정의 다양한 이유의 해외 이주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정착을 위한 집단 이민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 대상은 브라질의 농업 이민이었다.
당시 우리 한국은 몹시 가난한 나라였다. 먹을 것조차 없었기 때문에 농업은 피폐화 되고 많은 사람이 도시로 향해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정부는 1962년 해외이주 법을 제정하여 많아지는 인구를 해외로 내보내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인구 압력을 줄이고 해외에서 사는 교포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벌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농업 이민은 브라질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로 확대되었다.
독일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월남 파병도 이런 이민 정책으로 진행이 되었다.
브라질에서는 방대한 토지를 개간할 농업 인력이 언제나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농사를 지을 이민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양국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면서 정부 주도의 이민 사업이 1960년대에 시작이 되었다.
브라질 이민의 초창기에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정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민사가 펼쳐진다.
당시 이민의 경험은 전혀없었고 심지어 한국 정부 조차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 당연히 브라질 현지에도 조력자나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의 브라질 대사관의 존재도 없었으며 그저 미주 대사관(미국과 캐나다, 남미를 총괄하는)이란 이름으로 미국에 위치해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런 정보도 없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초창기의 이 농업 이민으로 떠난 사람은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보다는 도시에서 사는 실향민이 더욱 많이 차지했다.
농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우여곡절 끝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땅은 그저 황무지 같은 땅이었다. 한국에서도 농사를 잘 모르는 이들이 브라질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땅만 덩그러니 있는 곳에서 새롭게 개간을 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작물도 땅도 농사법도 너무나 다른 곳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들의 고충을 해결해줄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기를 당하기도 쉬었고 가진 돈을 다 날려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거친 브라질의 환경에서 새로운 꿈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민세대들에게 후손이 태어나자 그들은 삶을 더욱 확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중요했는데 텅 빈 시골에는 학교가 변변치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교육열과 자식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초창기 이민자들은 다시 도시로 이주를 떠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결국 그들은 상파울루로 이주를 하였고 당시 많은 철도가 지나다니는 루주 역의 주변인 봉헤치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알던 친구를 브라질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형, 그냥 봉헤찌로에 와서 오뚜기 슈퍼가 어디냐고 물어봐요”
당시 브라질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든 것이 서툴고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던 말 하자면 서울역에서 코 베이기 딱 좋던 때였다.
난 ‘오뚜기 슈퍼’란 한국적인 표현이 좀 이상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공중전화의 카드가 다 소진되었다. 당시에 -지금도 그럴 테지만- 공중전화가 잘 안 되는 것도 많았고 당시에는 공중전화로 핸드폰으로 전화하는 것은 꽤 비쌌다.
난 사전을 찾아가면서 오뚜기 슈퍼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한참을 공부했다. 잘 모르는 곳을 갈 때면 긴장이 되곤 했다.
택시를 잡고 택시 기사한테 이야기했다.
“봉헤찌로!” 그 기사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물었지만 무슨 말인지 몰랐다. 택시는 어떤 거리에 섰고 기사는 나에게 또 무언가를 물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난 사전에서 찾은 단어로 “메르까도(마켓의 뜻) 오뚜기?”라고 물어보았지만, 그는 아마도 모른다는 이야기 같았다.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택시기사는 무척 친절했다.
난 그곳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택시에 내리자마자 조금이 어리둥절하고 묘한 상황이 느껴졌다.
길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동양 사람들이었고 한국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이 브라질 땅이라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저 저기요~”이렇게 이야기하자 앞에 있는 사람이 돌아봤다. 난 “오뚜기 슈퍼가 어디예요?”하고 한국말로 물어보았는데 그 사람들은 한국말로 “이리로 저리로 해서 가세요”라고 이야기해줬다. 그리고 별것 아닌 것처럼 사라졌다.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난 좀 신기했다. 거리는 모두 한국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오뚜기 슈퍼에 도착했을 때 간판 역시 한국어로 ‘오뚜기 슈퍼’라고 적혀있었다.
그곳 상파울루의 봉헤찌로 거리는 코리아 타운이었던 것이다.
브라질에서 교민은 약 6만 명 정도가 있고 그중 80%는 봉헤치로에 거주한다고 한다.
이 봉헤치로는 처음에는 유대인의 거리였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와서 처음 바느질이나 봉제를 하면서 이 거리에 정착했다. 그렇게 시작한 바느질은 이제 브라질 의류산업을 장악했다. 이런 일에는 초기의 한국의 봉제 기술자들의 브라질 이민이 한몫을 차지했다. 그렇게 의류산업을 맨손으로 억척스럽게 일으켰고 브라질의 원단, 의류산업의 완전히 장악했다. 브라질 의류산업의 60%는 이곳에서 한국 이민자에 의해 차지되고 있다. 한때 브라질의 의류산업의 80%를 차지하던 시기도 있었다.
이런 감소는 브라질 한인들이 과거 의류산업에만 종사했지만 현재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브라질에서 봉헤치로와 의류로 대변되는 한국 문화에서 한류는 특히 브라질의 청소년을 사로잡았다.
전 세계적인 싸이 현상은 둘째 치더라도 K-pop은 브라질 청소년은 드라마는 브라질 중년층에 아주 인기가 높다. 그것은 비단 상파울루 같은 대도시나 마니아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브라질을 여행한다면 의외에 장소에서 k-pop 가수 팬이나, 드라마 주인공의 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예전에 브라질에서 한인 문화는 좋게 말하면 근면 성실한 것,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억척스러운 것,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노예처럼 일만 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했다.
볼리비아나 파라과이에서 이주한 남미 이민자들을 지하실 같은 곳에 가두어두고 노예처럼 일만 시킨다는 보도가 나와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부정의 이미지는 이젠 과거의 일이 되었다. 지금의 한국적인 이미지는 세련된 이미지에 고품격, 고품질이라고 할 수 있다. 세련된 패션, 음악, 드라마뿐 아니라 한국 기업의 텔레비전, 핸드폰, 자동차는 이곳 브라질에서도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최고로 통하고 있다.
예전에 브라질에서 -예전이라 해도 불과 몇 년 전에 - 국적을 물어볼 때는 항상 똑같았다.
처음에는 일본 사람이라 물어보고 그다음에는 중국 사람이라고 물어본다. 그 둘 다 아니라고 대답을 하면 그제야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하면 다음 과정이 또 있다.
‘북한이니 남한이니?’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많은 브라질 사람이 국적을 물어볼 때 바로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본다.
특히 세련된 옷을 입고 나가면 거의 다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본다.
하지만 남한이니 북한이니? 란 단순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진지할 수밖에 없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6·25 전쟁 당시 북한도 남한도 선택하지 않았던 반공포로들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남아 있었던 반공포로 중에서 북한과 남한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제3국을 결정했다.
이들은 1953년 8월 27일 제 3국인 인도로 향하게 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이명준’처럼 제 3국을 선택해서 인도로 도착한 이는 모두 88명이었다. 처음에는 이들은 스위스행을 희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브라질과 멕시코가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멕시코는 서류 작업이 늦어지는 바람에 이들은 브라질로 향하게 되었다. 총 56명의 반공포로가 1956년 2월에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서류에는 ‘무국적'이란 도장이 찍혀있었다.
이들은 실제로 1960년대 한국 이민이 막 시작했을 때 통역 등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한국인도 북한인도 아닌 상황에서 그림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당시는 군사정부였고 북한과의 대립이 가장 극심한 때였다. 이민자들에게도 그들은 반공포로라는 주홍 글씨가 새겨있었다. 그들은 초기 이민 사회형성에 크게 이바지했지만 소외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념 때문에 그들은 브라질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했다.
1963년 2월 12일 처음으로 산투스에 한국인 이민자의 배가 들어온 지 정확히 50년 후인 2013년 2월 12일 상파울루 카니발 행진의 스페셜 리그 챔피언을 뽑는 점수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이날은 챔피언을 결정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꼴등이 되면 카니발 2부 리그 강등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니깐 각 삼바 학교는 1등을 염원하고 동시에 꼴등만은 안 되기를 기도하는 날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로 행진을 했던 ‘빌라 마리아 연합'은 그들의 기도가 헛되게 꼴등이 되어 강등되었다.
그 다음날 2월 13일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삼바 학교의 챔피언을 뽑는 점수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마찬가지로 첫 스페셜 리그에서 행진을 한 ‘펠포르드 호샤의 순수’도 기도를 올렸다. 그들로서는 첫 출전이니 강등을 당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독일에서의 굿판에서 마지막으로 오리샤에게 바친 음식을 눈치 없는 경비원이 되돌려준 것이 부정을 탄 것일까?
이 삼바 학교도 꼴등으로 강등하였다.
그다음 날 신문들은 첫 뉴스로 우승한 삼바 학교들의 기쁨을 소개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다음과 같이 소식을 전했다
“한국을 주제로 한 삼바 학교 모두 강등되다"
하지만 어떠한가? 모든 일이 한 번에 될 수는 없다. 브라질의 초기 이민자들은 모두 자유와 생존을 찾아서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 이곳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멋진 일이 많아지리라고 본다.
브라질의 장점인 낙천적이고 흥이 많고 즐거운 삶.
그리고 우리나라의 장점인 근면 성실하고 책임감이 높은 삶이 혼합된다면 브라질이던 한국에서든 우리의 삶은 더욱더 좋아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