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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철 Jan 13. 2019

<브라질 팔도 유람>
01.1 바이아, Bahia

모든 성인의 만(바이아 지 또도스 오스 산투스)

모든 성인의 만 (바이아 지 또도스 오스 산투스, Baía de Todos os Santos)


1500년 4월 카브랄이 브라질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선단은 13척으로 이루어졌다, 카브랄이 이 선단의 대장이었고, 가스파르 지 레모스란 사람은 그중 한배의 선장이었다. 카브랄은 브라질의 땅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도로 다시 향했다. 그리고 가스파르에게 귀환을 명하고 포르투갈 국왕인 마누엘 1세에게 브라질의 존재를 알리라고 명령했다.

가스파르 지 레모스의 배는 다시 포르투갈로 귀환해서 국왕에게 브라질의 존재를 알렸다. 포르투갈의 국왕 마누엘 1세는 그에게 다시 이 새로운 땅의 존재를 탐험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그는 탐험가이자 도선사이자 항해의 최고 테크니션이었던 아메리고 베르푸치와 함께 또다시 브라질에 탐험을 나선다. 이 베스푸치 아메리고는 바로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의 유래가 되는 장본인이다. 그들은 포르투갈의 왕실에 명령에 따라 브라질 이곳저곳을 탐험하였다. 

그들은 처음 브라질 북동부의 아름다운 섬 ‘페르난두 지 노로냐’에 도착한 이후 그들은 본격적인 브라질을 탐사한다.

1501년 11월 1일은 가톨릭 달력으로 모든 성인을 위한 날이었다. 바로 그날 그들은 이 거대한 만에 도착했다. 

그래서 그곳을 모든 성인의 만이란 뜻인 바이아 또도스 오스 산투스, Baia todos os santos란 이름을 붙였다. 이후 모든 성인의 만은 이후 그 지역을 총칭하는 이름이 되었고 주의 이름이 되었다. 이 긴 이름은 후에 그냥 줄여서 만이란 뜻의 바이아라고 불렀다.


바이아는 인도양의 벵겔만에 이어서 세상에서 2번째 큰 만이다.

이곳은 열대성 기후에 아름다운 해변과 자연경치, 그리고 식민지 시절의 옛 건물들과 유산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바이아의 주도는 사우바도르고 원래 이름은 성 사우바도르 다 바이아, 즉 바이아의 성스러운 구원자, 즉 예수님을 뜻한다. 줄여서 그냥 사우바도르라고 부른다. 

바이아는 아프리카에서 온 음악과 춤 등으로 아주 유명하다. 음악과 춤 때문인지 이곳 사람들은 특유의 낙천적이고 여유로운 기질을 타고났다. 그래서 이곳은 “기쁨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런 특별함 때문에 수많은 노래가 이곳을 칭송했다.

브라질의 유명한 삼바, 까뽀에이라 등의 기원이 되는 곳이며, 또한 이곳은 특유의 음식문화로도 유명하다.

유럽의 식민시절의 영향, 아프리카의 영향, 아름다운 날씨와 자연환경 그리고 바이아 사람은 이곳의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래서 브라질 문화를 이끄는 많은 작가와 음악인들은 바이아 출신이 많다.

이곳은 80%가 넘는 인구가 아프리카의 후손들이다. 이곳은 식민시절의 유럽 양식의 건물과 교회로 특히 유명하다. 

이곳의 바닥은 예전의 로마 시절의 돌길 같아서 ‘검은 로마’란 별명을 가지고도 있다.


바이아의 사우바도르는 포르투갈 식민지 브라질의 가장 첫 수도였다.

1549년 토메 지 소우자는 400명의 군인과 400명의 거주민을 데리고 사우바도르에 첫 식민지 사업을 시작했다. 그 뒤 바이아의 사우바도르는 남미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되었다.

그 뒤, 1763년 리우 데 자네이루로 수도를 옮기기지만 여전히 사우바도르는 브라질의 고향이자 심장이었다.



브라질이 발견된 초기,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포르투갈로서는 브라질에서 그렇게 매력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금이나 은이 발견되었으면 모를까 브라질은 브라질 나무를 제외하고는 그저 훌륭한 녹색의 자연경관과 앵무새 같은 이상한 동물이나 있는 땅이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새 유럽의 나라들은 브라질을 수시로 침입하였다.


그래서 포르투갈에서 생각한 제도가 세습 봉토 제도(카피타니아)였다. 그것은 포르투갈 왕실 정부가 직접 통치하기 좀 그러니 선심 쓰듯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관리하게끔 하려는 의도이었다.

포르투갈과 비교하면 브라질은 엄청나게 커다란 지역이었다. 포르투갈 왕실이 그 전체를 브라질은 적도를 기준으로 평행하게 15 구획으로 자른 후 그것을 세습 영주라고 불리는 도나타리우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각 구획을 카타피타니아라고 불렀다. 세습 영주가 그 구획을 관리 통치하는 것이다.

세습 영주는 그 구획에 점유할 수는 있고 세습할 수 있지만, 매각이나 분할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그러니깐 소유는 분명 국왕에게 있었다. 이 제도는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제도가 세습 영주들에게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그 방대한 지역을 운영할 만한 자본이나 능력이 없었다.

어떤 세습 봉토는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많은 곳이 유명무실해지곤 했다.


마침 바이아의 세습 영주가 죽음으로 공석이 되었다.

그리고 포르투갈 왕실은 이 지역을 포르투갈 왕실로 전환해서 총독부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브라질 식민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바이아의 관문인 사우바도르는 브라질의 가운데 정도에 자리 잡고 있었고 지역 자체가 천연의 요새처럼 되어있었다. 이곳의 자연 성벽을 쌓아 놓은 듯한 절벽의 지형은 외부의 침략으로 도시를 보호해 주어서 성곽을 따로 쌓지 않아도 되었다. 이곳은 전략상 수도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사우바도르는 첫 수도가 되어서 본격적인 식민지 사업이 시작되었다. 브라질의 첫 도착이 후 거의 반세기 만이었다. 


금이나 은의 발견은 없었지만, 식민지 브라질이 성황이 되기 시작하게 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탕수수 농장이었다. 바이아의 열대기후는 카리브의 열대기후와 더불어 사탕수수 농업의 호황을 이끌었다.

사탕수수 농업의 성공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브라질로 데려왔다.

또한, 이 사탕수수의 많은 부는 유럽으로 가져갔고 바이아의 주도 사우바도르는 그 돈으로 유럽풍에 많은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노예의 고통으로 윗사람들은 잔치를 열고 금은보화를 창고에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죄를 사해 해줄 화려한 교회가 더욱 생기기 시작했다. 그 덕에 사우바도르는 세계에서 가장 성당의 밀도가 높은 지역이 되었다.

바이아에 관한 노래를 많이 부른 가수 도리바우 까이미는 이곳에는 성당이 365개 있다는 노래를 불렀지만 사실 그보다 더 많은 372개가 있다고 한다.


<엘레바도 라세다. 이 건물에 들어가면 대형 엘리베이터가 있다>

사우바도르의 특유의 절벽의 지형은 자연스럽게 낮은 도시와 높은 도시로 나누어졌고 그렇게 발전이 되었다.

낮은 도시에서는 주로 부두 등지에서 육체노동이 이루어지고 신분이 낮은 사람의 지역이었고, 높은 도시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활동하는 도시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졌다.

예전에는 라데이라라고 불리는 오르막길이 이 높은 도시와 낮은 도시를 연결해주었다. 따부앙, 게으름의 고개, 콘세이상 고개 등이 낮은 도시를 연결해주는 유명한 고개들이다.

이런 높은 동네와 낮은 동네들을 연결해주는 엘리베이터나 수레들이 건설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라세다라는 엘리베이터는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72m의 높이를 한 20초 만에 운반한다. 이 엘리베이터는 17세기부터 여러 형태로 운행이 되다가 1928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라세다 위는 높은 도시이고 모든 성인의 만의 아름다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광장과 17세기 풍 건물의 시청과 그리고 세 광장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옆이 펠로우리뇨 지역이다.


라세다 엘리베이터 아래는 낮은 도시라 불린다. 항구가 가까운 곳에 다양한 관광 상품과 기념품 시장인 메르카도 모델로 그리고 상업지구 꼬메시우가 위치한다.

메르까도 모델로는 단순한 시장을 넘어서는 왠지 모를 바이아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 있다. 바이아를 대표하는 예술가들과 음악인들, 예를 들어 조지 아마두, 피에르 베제, 카리베, 그라우베 호샤, 카마페우 지 오쇼시, 메스뜨리 빔바 같은 사람들이 이곳을 특별하게 여겼고 자기들 작품에 자주 사용을 하기도 했다. 많은 예술가나 작가들이 이곳을 언급해서 그런지 아니면, 이곳의 느낌이 그들의 촉을 깨웠는지는 모르겠다. 

신기한 것은 이 시장 아래에는 미스터리한 거대한 지하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 이 지하 공간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 공간에 사람들이 예전에 노예를 가두어 놓았던 곳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메르까도 모델로는 잦은 화재로 몇 차례 전소가 되기도 했다.


이 모든 성인의 만 주위의 지역을 헤꽁까부 지역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사탕수수뿐만 아니라 담배 농장으로도 유명했다. 

이 지역은 바이아 지역의 음악인 삼바 지 호다란 음악의 고향이기도 하고 까뽀에이라, 마쿠렐레 등은 바아아 전통 음악과 전통 무술, 춤의 고향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길에서의 축제가 항상 가득하다. 그래서 사람을 행복하게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헤꽁까부의 지역의 내륙 도시들은 사탕수수나 담배 농장에서 사우바도르까지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도시를 발전시켰다. 까쇼에이라, 성 펠리스, 상투 아마루의 삼각 도시들은 이런 환경에서 도시가 성장했다.

또한, 이 도시는 흑인 노예들의 문화가 융성한 곳이다. 까쇼에이라의 좋은 죽음의 축제(페스타 보아 모르치), 산투 아마루에 호다 지 삼바 등등, 아프리카에서 건너와 바이아의 문화로 정착한 곳이다.

산투 아마루는 브라질의 세계적인 가수 까에타노 벨로소와 마리아 베타니아의 고향이다. (이 둘은 자매지간이다.) 그들은 산투 아마루의 풍성한 문화적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헤꽁까부의 다양한 섬들은 아프리카에서 전해 내려온 브라질 무술 까뽀에이라 마스터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말레 섬, 이따빠리까섬 등에는 까뽀에이라 마스터들의 전설이 가득했다.

특히 브라질의 홍길동 혹은 울버린이라고 할 수 있는 고푸 페샤다 비소우루도 이곳 출신이다.


바이아는 끝없는 해변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바이아 남부는 해변의 라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열대의 해변이 계속된다. 바이아 남부는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처음으로 브라질에 도착했던 포르투 세구루, 과거 히피들의 거점이었던 트랑코소등의 도시도 유명하다. 바이아 남부는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의 재배지로도 유명했다. 특히 이타부나와 일례우스는 카카오로 성장한 도시이고 브라질의 작가 조지 아마두가 바로 이곳 출신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인 “가브리엘라”는 바로 일례우스를 배경인 소설이다.


바이아, 얼마나 많은 음악과 시들이 이곳을 칭송했던가?

바이아에 가보셨나요? 안 가보셨다면 일단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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