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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을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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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희 Mar 22. 2018

을의 연애 4

남자친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친구이지만 남자친구가 결코 아닌 것 같은 이런 억울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주환의 관심사는 더 이상 복희가 아니었다. 그의 우선순위에는 복희가 없었다. 그의 미래에도 복희가 없었다. 그의 인생에는 ‘복희’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복희는 그동안 퍼부었던 애정, 노력, 돈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졌다.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복희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헤어지지 못해서 복희는 혼자 속앓이만 했다.


주환은 오로지 자신밖에 몰랐다. 복희가 당장 내일 아침에 일찍 할 일이 있어서 일찍 헤어져야 하더라도, 본인이 심심하거나 그녀와 더 있고 싶으면 보내주지 않았다. 강압적이지는 않았지만, 복희를 압박하기엔 충분했다.


친구를 만나서 놀고 있을 때에도, 복희는 그가 보낸 “보고싶다”는 문자 한통이면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보러 간 적이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복희는 미움을 받거나 관계가 끝날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그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도 복희는 알고 있었다. 그저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그녀를 부른다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항상 자취방으로만 불렀으니까. 스킨십을 할 때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봐줬으니까. 가끔 밖에서 데이트를 하자고 하면 그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귀찮아 한다는 것을 그녀가 느끼게 했으니까.복희가 열 번 넘게 밖에서 데이트를 하자고 졸라야지 한 번 나갈까 말까 했다. 나간다 하더라도 썩 유쾌한 데이트는 아니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걸 구경하려고 하면 그만하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으니까.


복희는 밖에 있는 벤치에 몇 시간이나 앉아 공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걸 즐겼고,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친구와 같이 벤치에 앉아있고 싶어 했다.  벤치에 앉은 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주환은 복희에게 대체 왜 이렇게 오래 앉아 있는 거냐고 타박하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돌아다니는 길냥이가 예뻐서 조금만 지켜보자고 하면 더러운 걸 왜 보려고 하냐며 빨리 갈 길이나 가자고 재촉했다. 카페에서 남자친구와 수다를 떨려고 하면, 주문한 아이스초코를 3분 만에 다 마시고는 나가자고 했다. 여유가 넘치다 못해 게을러빠진 주환은 이럴 때만 성격이 급했다.


주환은 복희가 원하는 건 정말 단 하나도 해주지 않았다. 그에게 말도 안 되는 걸 바라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모든 걸 아까워했다. 복희가 원하는 건 그저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바라는 그저 그런 사소한 것들이었다. 꼭 남자친구가 아니더라도 친구들이라도 해줄 수 있는 그런 사소한 것들.


복희는 돈이 없는 그를 대신해 모든 데이트 비용까지 본인이 부담했다. 돈과 시간을 쓰며, 복희 자신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무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시간을 보낼수록 복희는 점점 더 그에게 집착했다.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큰 돈을 따내기 위해 이미 시작한 도박을 끝낼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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