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이라서 당당한거지
그 뒤로 주환은 계속해서 자기가 필요할 때만 복희를 찾았다, 주환은 자취를 하겠다고 했다. 복희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없는데 어떻게 나갈 계획이냐고 물었다.
“엄마가 삼백 만원 주더니 나가래,”
“겨우 삼백 가지고 어떻게 나갈 건데?”
“몰라. 왜 삼백 만원 준 줄 알아? 고아원에서 자란 애들이 다 크면 나갈 때 애들한테 삼백 만원씩 준대. 그래서 삼백 만원 주는 거래.”
“어머니가 진짜 그렇게 말하셨다고? 너무 하시는 거 아니야? 네가 고아야? 어떻게 자식한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지.”
“난 그냥 아무 생각도 없어. 어렸을 때부터 이런 말 많이 듣고 자라서,”
복희가 아는 주환은 오랜 시간동안 폭언에 노출된 채로 살아왔다. 그래서 주환의 표정은 익숙하다는 듯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그런 주환을 바라보다가 복희는 현실적인 조언을 내놓았다.
“그럼 일단 집부터 알아봐야지. 너 지금 돈도 안 버는데 하루 이틀 조금씩 쓰다보면 또 그 돈도 금방 사라진다.”
“알겠어. 알아볼 거야.”
복희는 언젠가부터 주환이 게으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입에선 하겠다는 말만 나올 뿐 정말 하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복희는 주환이 집을 알아본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믿고 싶었지만, 곧 자취 문제로 또 한바탕 하겠다는 예상만 할 뿐이었다.
복희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집을 알아본다고 한 지 한 달이 흘렀지만, 주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삼백 만원은 어느새 이백 만원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복희는 할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하는 성격인지라 그런 그를 답답해했다. 그녀의 마음엔 주환의 행동에 대해 해주고 싶은 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도움이 되는 말이라도 주환에게 했다가는 싸움으로 이어질 게 뻔해 마음에 꾹꾹 눌러 담을 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성격이 참 쿨하다’라는 말을 흔히 듣는 복희였지만, 주환에겐 ‘제발 신경 좀 꺼’라는 말을 더 자주 들었다. 그래서 복희는 “나 진짜로 최주환이 굶든 말든, 힘들든 말든, 할 일을 미루든 말든 신경 안 쓸 거야”라고 했지만, 그 다짐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그랬듯이 출근을 한 복희는 새벽 내내 게임을 하고 아침에 잠이 든 주환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녀의 퇴근시간이 그의 기상 시간이었다. 어느 날 복희는 결국 눌러 담았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
“주환아. 집 알아봤어?”
“아니. 알아볼 거야.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지금 돈도 벌써 많이 없어졌잖아. 너 이렇게 하다가는 나중에 돈 때문에 못 나가. 어쩌려고 그래. 네가 일 하는 것도 아니고 맨날 집에만 있으면서 집도 알아보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너보고 도와달라고 한 적 있어? 그만 좀 해.”
“내가 봤을 때는 너 일 미루는 거 이거 좀 병적인 것 같아.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너 이러는 거 엄청 많이 봤잖아. 일단 날짜를 정해. 며칠까지 하겠다고 정해서 하면 괜찮아질 거야. 미루는 것도 다 습관이야.”
“아 그럼 어떻게 하라고?”
“너 일단, 은행에 가서 생활비 통장이랑 고정지출 통장부터 나눠놓자. 너 삼백 만원을 통장 하나에 몰아놓고 카드 들고 다니니까 그냥 돈을 함부로 쓰고 있잖아. 그것부터 하고, 너 공인인증서도 없다며. 자취할거면 앞으로 월세 꼬박 꼬박 내야하는데 그 때마다 은행 찾아가서 낼 것도 아니고, 핸드폰으로 보내야 되니까 다 해와. 이번 주 내로 알겠지?”
“응 알았어.”
그녀의 설명을 들은 주환은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미룰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복희가 말한 ‘이번 주’는 또 지나가버렸다. 그녀는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너 은행 다녀왔어? 집은 알아보기는 했어?”
“아니.”
“진짜 나랑 뭐 하자는 거야? 가족들 집에서 나가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차라리 나가기 싫다고 말을 해. 그럼 나도 너한테 자취 얘기 더 이상 안할 테니까. 듣는 너도 말하는 나도 서로 스트레스인 거 마찬가지잖아.”
“그게 아니라. 나 혼자 못하겠어. 네가 해줘.”
“내가 회사를 다니는데 어떻게 은행을 같이 가냐. 은행은 너 혼자라도 다녀와.”
결국 집은 복희가 알아보게 됐다. 그녀는 자취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정보를 얻거나, 쉽게 방을 구경할 수 있는 앱을 다운받아 시세를 알아봤다. 부동산에 연락해 방을 알아볼 날짜를 잡는 것까지 그녀의 몫이 되어버렸다.
“가자. 3번 출구 앞에 있는 빵집 앞에서 기다리면, 부동산 아저씨가 방 보여주신대.”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못 떼는 주환은 “그래?”하며 복희를 따라나섰다. 복희가 말한 빵집 앞까지 가는 중에도, 도착하고 나서도 그는 게임만 할 뿐이었다. 5분쯤 지났을까 그녀와 통화했던 아저씨가 차를 끌고 나왔다. 복희와 주환은 그 차를 타고 방을 보러 다녔다. 방이 마음에 들면 보증금이 비쌌고, 살고 싶지 않은 방은 보증금이 쌌다. 그래서 딱 마음에 드는 방을 찾을 수 없었고, 방을 보러 다니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나중에 복희는 멀미까지 했다. 주환은 그녀에게 나중에 또 방을 보러 다니자고 했다. 멀미하는 그녀를 걱정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더운 여름 날, 더 이상 돌아다니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아챈 그녀는 말했다.
“아니. 오늘이 마지막이야. 오늘 골라야 돼. 다음은 없어. 이 짓을 나보고 또 하라고? 싫어, 오늘 끝내자”
마음에 드는 방이 나올 때까지 멀미를 참으면서 돌아다녔다. 결국 마음에 드는 방을 찾았다. 보증금 200에 월세 40만원이었다. 복희는 이마저도 39만원까지 깎았다. 그녀는 계산하기 시작했다.
“주환아. 너 지금 얼마 있어? 지금 바로 나가야할 돈이 이백 사십 만원이야. 근데 그것만 생각하면 안 돼. 자취하면 사야 될 것들도 많아지잖아.”
“나 이백 사십 만원 없는데?”
없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그런 태도는 복희를 더욱 자극했다.
“넌 내가 진짜 이유 없이 화내고 짜증내는 것 같지? 아니야. 봐봐 결국 내말대로 됐지? 내가 분명히 빨리 집 알아보라고 했지?”
“아 어쩌라고. 짜증 좀 그만내.”
“최주환, 너 진짜 적당히 해. 아 짜증나 죽겠네. 도와달래서 도와주고 있는데 너는 내가 그동안 누누이 말한 거 다 무시하고 나랑 장난 하냐?”
복희가 도와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가버릴까 걱정됐는지 이번엔 주환이 잠잠하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알겠어. 미안해.”
“미안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어떡할 거야? 돈 없잖아.”
“아, 몰라.”
“모르겠으면 생각을 해. 나 너 만나면서 진짜 많이 참고 있거든? 근데 오늘은 아니야. 사람이 도와주는데 이딴 식으로 행동해?”
“짜증 좀 그만 내라고. 미안하다고.”
“너도 그만해. 돈 모자른 거 어떻게 할래?”
“아 몰라. 어떡하지?”
“아 진짜 화난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든가. 단기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고 하든가. 뭘 자꾸 모른다, 어떡하지야? 넌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해? 네 머리는 게임할 때만 쓰이니? 어떻게 해야 캐릭터 진화가 잘되는지 그런 생각만 해? 응? 나한테 돈 빌려달라고 하는 건 자존심 상하니? 아니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빌려주길 바라는 거야? 넌 진짜 왜 그렇게 여유로워?”
“그럼 돈 빌려줘. 내가 나중에 갚을게.”
“휴. 그래 알겠어. 오늘까지 돈 보내달라니까 일단 이체하러 가자. 핸드폰에 은행 어플있지?”
“아니? 없는데?”
“무슨 소리야. 내가 은행가서 공인인증서 다 해놓으라 했잖아. 그럼 그거 컴퓨터에 들어있는 거야?”
“아니?”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거야? 너 진짜 죽고 싶어서 용을 쓰는 거야? 왜 그래 진짜 오늘?”
“아니 복희야. 나 네가 무슨 말 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주환아 내가 그 날 말했잖아. 월세 내려면 이체해야하는데 그때마다 은행에 가서 할 거냐고. 지금도 시간을 봐. 은행 문 닫은 지가 언제야. 응?”
“그러면 내일 은행가서 이체하면 되잖아.”
“야. 너는 계약 이런 거 개념을 몰라? 오늘까지 달라고 하면 일단 줘야 되는 게 맞아. 아 진짜 속 터진다. 일단, 피시방이라도 가자. 은행 로그인해서 인터넷으로 할 수 있을 거야.”
짜증을 애써 숨기며 복희는 주환을 데리고 피시방으로 갔다.
“은행 로그인해.”
“어떻게 해?”
“뭘 어떻게야? 네 계정으로 로그인하라고.”
“나 아이디 없는데?”
“아니 또 무슨 소리야. 저번에 내가 물어봤을 때 은행 다녀온 날 다 했다고 하지 않았어? 너 진짜 나 엿먹여? 그럼 가입이라도 해.”
가입을 하려면 기존의 계좌번호와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너 계좌번호 뭐야. 여기에 적어.”
“몰라.”
그 말을 들은 복희는 마우스를 내리쳤다.
“진짜 너 대체 아는 게 뭐야?”
화가 난 복희는 주환에게 “너 그냥 게임이나 해라”하고는 혼자 해결했다. 이체도, 이사를 가는 날 예약까지도. 모든 걸 혼자 했다.
이사를 가는 날, 짐 옮기는 것도 복희가 다 나서서 도와줬다. 그녀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제 내야할 돈은 복비였다. 그녀는 주환에게 몇 번이나 복비에 대해 설명해줬다.
“그냥 쉽게 생각해서 수수료야. 여기 주택이니까 아마 0.4% 떼주면 될 거야. 나도 잘은 모르는데 인터넷 뒤져봤어.”
복희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주환은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그녀가 화를 낼 것 같으니 “응”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복비를 내야하는 날, 부동산 아저씨는 복비를 달라며 서류를 보여줬다. 서류를 읽은 둘의 반응은 달랐다. 주환은 알겠다고 했고, 복희는 그런 그를 째려봤다.
“아저씨, 0.4% 아니에요? 왜 0.9%예요?”
“아 여기가 주택이 아니라 근린생활시설이예요. 그래서 0.9%예요.”
“아니 그걸 이제야 말씀해 주시면 어떡해요. 저희는 당연히 주택인 줄 알았죠. 그런 건 처음부터 말씀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해서 갑자기 0.9% 내라고 하시면 저희 쓸 돈 하나도 없어요.”
복희는 예상했던 것보다 지출이 커져 당황스러워했지만, 주환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저씨, 정말 죄송한데요. 저희 이런 돈 못내요. 이렇게 하시는 게 어딨어요? 저는 태어나서 근린생활시설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고요. 더군다나 자취가 처음인데, 당연히 그냥 주택이라고 생각했죠. 깎아주세요. 안 깎아주시면 그냥 이십 만원 날리고 저희도 다른 방 알아보는 게 나아요.”
“아 진짜 안 되는데 그럼 몇 만원만 깎아줄게요.”
“아니요. 그냥 0.4%만 받으세요. 진짜 이렇게 하지마세요 제발 좀.”
결국 부동산 아저씨는 복희가 말한 돈만 받고는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주환은 고맙다는 말도, 돈을 아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큰 지출이 나가지 않았는데도 자취방에 앉아있는 복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넌 할 줄 아는 게 뭐야? 내가 지금 내 돈 아꼈니? 네 돈 아꼈지. 하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주환은 그런 복희를 예민하다는 듯 여겼다.
“아니 나는 근린생활시설이 뭔지 복비를 어떻게 계산하는 건지 모르니까 그러지!”
“그런 거 다 떠나서 예상했던 지출보다 더 나가게 생겼는데 그걸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고 주겠다고 하는 게 정상이냐?”
더 이상 언급하기 싫다는 듯 주환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아 알았어, 복희 최고야. 너 덕분에 돈 아꼈네.”
“아 진짜 답답하다. 누가 칭찬 듣자고 이러니?”
자취 첫 날부터, 주환이 해야 할 일을 복희가 다 도맡아서 했다. 이런 상황은 주환이 자취를 그만두고 본가를 돌아가서도, 헤어지기 전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