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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 소녀 Jun 20. 2024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새들은 서로 뭐라 이야기 하는 걸까. 고요한 아침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궁금해진다. 나무들은 알아들을까.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아이들을 깨우고, 학교 갈 채비를 한다. 


오늘 아침, 쌍둥이 아들들 중 한 명은 수업 시작 전 친구들과 축구를 할거라며 서둘러 집을 나갔고, 한 아이는 늦장을 부리며 신발을 신다가 학교에 같이 가지며 나의 옷을 잡아 끌었다. 

집 밖을 나서니, 6월 초여름의 열기가 아침부터 후덥지근,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학교 앞에 도착, 담 너머로 먼저 간 아들이 친구들과 축구하는 모습이 보였다.


쌍둥이라 둘이 태어나서 지금껏 쭉 같이 붙어 있다 보니, 외롭지도 않고, 심심하지도 않고 별 부족한 게 없는지 다른 친구들과 놀고 싶다는 니즈도 딱히 없고, 그러다 보니 친구를 만들어 줄 필요도 없었고, 따로 만날만큼 친한 친구들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또래들에 비해 사회성이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친화력 역시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장점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보면서도 부족하다 여겨지는 부분에 좀 더 마음을 쓰는 경향이 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동안 괜스레 걱정 아닌 걱정도 했었는데, 오늘 아침 축구하며 뛰어노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놓이면서 참으로 괜한 걱정이였구나 싶었다.


그저 아이들은 자신의 성향과 배경에 맞춰 세상을 배우고 느끼고 깨달으며 자신의 기질과 페이스에 따라 자연스레 성장해 나가는 것 뿐인데, 마치 부모라는 역할이 대단한 특권을 뒤집어쓴 마냥, 오지랖을 떨며 걱정하는 것이 괜한 것 같으면서도 쉽게 멈출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평균에서 떨어지면 낙오될까 어찌될까 어쩔 줄 모르는 부모의 조급함이 사랑의 이름 아래 정당화 되며, 걱정으로 표현된다. 그저 아이들을 믿어주면 될 것을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아이를 닦달하게 되고, 닦달하는 부모의 조바심과 괜한 걱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되어 아이들 역시 슬슬 그렇게 어른의 삶의 태도를 닮아가며 조급하고 불안하게 성장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며 나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사실 걱정해야 할 대상은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아닐까. 아이들을 보면, 그들은 현실에 충실히 정말 잘 살아간다. 과거에 대한 후회 없이, 미래에 대한 근심 없이, 그저 현실에 충실히 몰입해서 살아간다. 현재만 있음을 이미 아는 것 처럼. 어른들이 못하는 걸 아이들은 한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서, 학원에서 그리고 친구들과 놀이도 운동도 주어진 시간을 꽉 채우며 보내고, 그렇게 활동을 열심히 한만큼 잠도 꿀잠으로 불면증도 없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정확하고 모든것에 진심이다. 


내가 성장할 때만 해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감사해야 할 대상은 항상 부모였고, 어버이날 때마다 “부모님, 저를 태어나게 해주시고 길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자식 입장에서부모님의 무한 사랑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 배우고 컸었는데, 막상 부모가 되어 보니,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을 먼저 주는 것도 자식, 삶에 대해 큰 가르침을 주는 것도 자식, 자식이야 말로, 부모를 한층 성숙하게 성장시켜 주는, 삶을 폭넓게 만들어 주는 하늘의 선물 같은 고마운 존재 아닐까. 


어린 아이들, 아니 청소년기 아이들만 봐도 우리는 그들에게 찬란한 미래가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찬란하다고 뭔가 삐까뻔적한 것 이 아니라, 그저 너가 무엇이든 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이때 우리는 시간을 전제한다. 아이들 앞에 펼쳐진 시간. 성인이 될 때까지의 시간 아래 열린 아이들의 무한 가능성.

그런데 이런 가능성의 시간은 사실 아이들에게만 펼쳐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몇살이건 어떤 시점에 있던 간에 무한한 가능성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데 어른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데서부터 가능성이 막혀버린다. 


과거에서부터 성공을 쫓아, 혹은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일궈온 일관적인 어떤 삶의 패턴이나 방향의 얽매임 없이, 다시 아이가 되어봄은 어떨까. 어렸을 때 빛나던 우리의 빛은, 우리가 무리 안으로, 사회 안으로 들어감에 따라 희미해졌고, 결국 도대체 찾을 수가 없어졌다. 그저 무리 안에 한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 사회의 의젓한 어른의 모습이고, 이것이 우리 아이들의 본보기가 되는,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어른의 모습이라니.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어른인 우리는 잘난척 그만하고 아이들로부터 배워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을 잘 관찰하다 보면, 그들의 반짝임이 눈빛에서부터 보인다. 어른들과 달리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답다 아이들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잠재력은 근본적으로 새롭지만, 
시도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걸로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관심이 가는 일이지, 
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다. 
이 원칙은 실제 생활이나 지적 생활에서 지키기가 몹시 어렵지만, 
위대함과 평범함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이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는뭐가 당신의 의무인지 
당신보다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항상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의 힘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러면 당신의 시간을 빼앗기고 당신의 개성이 흐릿해진다…

그러나 당신이 선택한 일을 한다면 쉽게 알아볼 것이다. 
그 일을 하면서 당신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지혜로움이란, 천개의 눈을 가진 현재로 과거를 끌어내 재판받게 하고, 
매일매일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게으름은 가장 탁월한 재능들을 망칠 수 있다. 

-랠프 월도 에머슨 (1803~1882), 자기 신뢰-



이런 어른이 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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