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십대 소녀 Jun 24. 2024

부모의 역할이란

모든 부모는, 자신의 경험 아래 정립된 가치관 아래 아이들을 교육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왜냐면 자신이 살면서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 곧 그것이 진실이라 믿기 때문.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상황 아래 동일하게 처신하거나 사고하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경우의 수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부모는 절대 완벽한 인간, 신이 아닌, 그저 아이와 똑같은 불완전한 인간 일 뿐이므로, 몸에 벤 습관대로 가르치는 것이 부모 입장에서는 최선일 수 있겠다.

 

난, 아이들이 어렸을 때야 엄마만 행복하면 될 것으로 보았다. 부모의 행복한 기운을 아이들에게 전달해주며, 그러면서 신조껏 아이들을 양육하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고, 유아기 시절, 양육에 있어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뿐,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본보기는 부모이기에, 부모가 행복하고, 열심히 일하며 사는 모습을 함께 공유하면 그것이 아이들에게 최상의 공부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이런저런 주변 아이들을 보게 되면서, 과연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잔잔한 수면위에 파도를 종종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데, 벌써 선행학습이다 뭐다 이미 앞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여럿, 계속 늘고 있는데, 나만 손 놓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너무 행복한 엄마 되기에만 매몰되어 있는 건 아닌지, 아이들을 뒤쳐지지 않게 키우기 위해서는 정보력이 필수적이라는데,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지. 휴.


나의 방향성을 믿으면서도, 종종, 내가 혹시나 아이들에게 잘못 하는 것은 아닌지, 교육학을 밟아 본 적도 없는 내가 내 식대로 리드하며 아이들을 끌고 가는 것이 옳은 건지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할 때면, 아이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부모란 역할에 내가 너무 별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닌가, 좀 더 진지해야 하는건 아닌지 반성의 시간도 갖게 된다.


나 역시 나의 경험 하에 얻은 가치들을 나의 아이들에게 전파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최선 일 수 밖에 없으나,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세계가 따로 있고, 혹여나 그 안에서 낙오되거나 뒤쳐짐에 상처받으면 어쩌지 일생일대 처음해보는 미숙한 엄마 역할에 대한 걱정이 몰아치는 것이 이 모든 불안과 고민의 핵심.



그러면서도, 한편, 이것이 나와 우리 아이들의 운명 아닐까 이런 생각에 안도하기도 한다. 나는 나의 부모를 만나 이렇게 컸고, 우리 아이들은 나를 만나 또 다른 식으로 성장 할테고. 분명히 그 안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비교 경쟁 아래 힘겨움과 실망, 자신과의 싸움, 상황적 어려움 등 여러 상황 아래 놓이게 될 텐데, 그 과정을 어떻게 겪고 어떻게 성장하느냐는 오직 아이들의 몫이므로, 부모인 내가 그 너머까지 걱정하는 것은 과유불급 선을 넘은 건 아닐까.


나 역시 우리 부모가 최선을 다해 키워 주셨고, 그 영향력에서 성장했지만, 성인이 되어 보니, 나와 우리 부모님의 교육에 대한 가치관, 세계관은 많은 부분 일치하지 않기도 한다. 즉, 우리는 부모와 자식으로 연결되었지만 서로 다른 존재임을 깨닫는다. 

즉, 부모가 과히 아이들의 성장과 인격에 많은 영향을 미침은 부인 할 수 없으나, 그러나 그것은 오직 먼저 살아 본, 부모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일 뿐, 아이들이 그것을 따를지 말지, 어떤 어른으로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온전히 기여하는 것은 바로 아이들 그 자신들임으로, 아이들을 믿고,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소통하면 될 뿐, 부모가 아이들의 삶을 과하게 걱정하는 지금 나의 불안한 마음도, 어찌보면 아이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도를 넘은 부모의 집착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부모의 정성스런 지원과 도움 아래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단계를 거쳐 성장하여 좋은 직업과 많은 돈을 벌게 된다고 할지 언정, 그 사람이 다른 이들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다 보장 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 사람이 다른 이들보다 행복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크지 못한 내 아이가, 그렇게 큰 아이를 보며 그런 사회적인 잣대 아래 부러워하며 부모인 나에게 실망의 눈빛을 보낸다 하면,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할 것이나, 그러나, 그 부러움을 이겨내야 하는 몫은 어쩔 수 없는 아이의 몫 일 수 밖에 없다. 이는 부모도 자식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역할의 한계, 독립된 존재로서의 운명이기에, 그러므로 난 부모의 입장에서, 불완전한 일개 인간으로서, 그저 지금의 아이들 양육에 있어 자만하지 않은 자세로, 반성하고 뒤돌아보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자식을 향한 나의 책임이자 역할, 사랑이겠지.



아이들에게는 먼저, 공부해야 할 동기를 스스로 정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고, 그 동기 아래 스스로 자신이 뭘 잘 하고, 무엇을 했을 때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지 관찰하며 알아챌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 그것이 교육의 목적이라 생각한다. 즉, 성장하며 앞으로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일을 찾는 것은 아이의 몫, 그리고 아이의 선택을 믿고 기다리며 신뢰해 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런데, 나와 아이들의 삶을 이중 잣대로 분류하여 사고하며 판단하지 말자. 항상 부모의 선택을 믿고 기다려주며 신뢰해 주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 부모 역시 자신을 충만하게 해주는 것들을 찾으며 하루하루를 부지런히 열심히 보내야 하지 않을까. 


40대 부모들에게는 시간이 준 특권이 있다. 희미하게 나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이 내게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지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이제는 무엇이 내게 좋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만, 문제는, 그것을 행하며 살기가 생각보다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그리도 그것을 찾으려 한들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기는 시작하는데, 게으름과 의지 박약, 습관적인 생활 패턴과 이런저런 사회적인 유혹과 핑계 아래 우리는 그것들을 슬며시 놓아버린다.

암튼, 40대 엄마로서 나를 뒤돌아보기 전에 종종 잔소리 폭탄을 발사하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그럼에도, 엄마의 잔소리를 묵묵히 참아가며 기운 넘치게 운동하고 생활하는

학교 간 초딩 2학년 엉아들이 오늘따라 벌써 보고싶다.

엄마인 나도 그들과 함께 씩씩하게 성장해 나가리라 오늘도 용기를 낸다.


그리고, 부모로서뿐 아닌, 인간으로써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함이

참으로 중요함을 이 글을 쓰며 깨닫는다.


이전 05화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