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미용실에 다녀온 후 후회를 했다. 후회 속 짜증의 화살은 열심히 머리를 해준 미용사에게 날아갔다. 그 분의 전문성을 의심하며, 내가 기대했던 머리스타일은 이게 아닌데. 기분 전환을 하러 갔다가 짜증만 겹겹이 쌓여 왔으니 1초마다 입을 삐죽거리며 거울을 들여다본다. 아 짜증나, 다시는 그 미용실 가지 말아 야지. 왜 이렇게 아줌마 같이 머리를 자르고 난리야!
얼굴을 보자. 아줌마이니 아줌마 같이 머리를 자르지!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더 크게 소리치며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지겨워한다.
미용실을 다녀오고 이런 일은 종종 있다. 돈을 쓰고 바꾼 내 새 머리가 얼굴과 어울리지 않은 듯하면, 누굴 탓하랴, 나의 얼굴을 탓해야 하는데, 애꿎은 미용사를 탓하곤 한다.
대부분의 후회와 짜증 화남 등의 부정적인 감정 제공의 근본 원인은 내게 있는데, 날까로운 칼끝을 곧잘 바깥으로 들이 밀고, 화를 식힌다.
마음이 얼굴에 쉽게 드러나는 편이라, 열심히 머리를 해준 미용사 분도 나의 기분을 감지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을 수 있음에 미안해진다.
30대 중반까지 긴 머리를 고수해 오다가, 몇 년 전 짧은 단발로 잘랐다. 짧게 자르고 나니 너무 편하더라. 머리 감기도 가볍고, 말리기도 쉽고. 얼굴에 어울리냐 않느냐는 떠나, 편안함을 먼저 추구하는 나를 보며, 정말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했다. 그리고 뭔가 이제는, 긴 머리의 여성스러운 여인이 되기보다는 나만의 스타일을, 나만의 매력을 고수하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뭐, 단발이 잘 어울린다는 말도 줄 곧 듣다 보니 짧은 머리로 몇 년을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 올해 초 부터인가, 머리 긴 여인들이 너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인가. 역시, 사람은 변화가 필요하다.
이제 다시 머리 좀 길러봐야지. 2020년 겨울 되기까지는 절대 미용실 가지 말고 기르자. 하지만, 몇 달 가지 못해, 기분이 싱숭생숭한 날이면 욱~하는 심정에 미용실에 가서 훅 머리를 자르고 오곤 했다. 기분 변화를 주고 싶을 땐 머리 자라는게 직빵이다, 아니, 그 과정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시원스럽다. 단, 결과물이 맘에 들지 않을 땐, 더 깊은 터널로 빠져 몇일을 허우적거리니 웃기다.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정도까지 자랐고, 이번에는 꼭 길러야지 몇 달을 질끈 동여매고 다녔었는데, 가을에 말이 살찐다고 했나. 식욕만 왕성해지고, 하루하루의 삶이 조금씩 무기력 해지려는 찰나를 감지, 다시 머리를 자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무서운 코로라로 단골로 가던 미용실 주인은 바뀌어 있었고, 조급한 마음에 예약 가능한 근처 동네 미용실에 아무런 정보 없이 들어갔다. 그냥 짧게 자르면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았다. 긴 머리에 대한 로망을 구석에 잠시 밀어두고, 미용사가 아닌 마술사를 만나러 간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나는 머 대충대충 설명했는데, 척하면 척~ 왜 못 알아듣지, 왜 이렇게 조심조심 자르지, 왜 이렇게 답답하지. 더 짧게 잘라주세요.
그 뒤, 확~ 짧아진 머리를 보고 역시나 난 못마땅 해졌다, 이게 아닌데. 이상 할 것 같으면 다른 스타일로 제안해야 하는게 맞지 않나, 미용사의 전문가적 자질을 의심하며 휙 나와버렸다.
그 날, 미용사를 탓하며, 저녁 내내 머리 때문에 씨름했다.
그러다.. 그러다가 현타가 왔다.
우와 진짜 나 사소한 것 하나에도 끝장을 보는 피곤한 성격이구나. 여기에 이렇게 나의 감정을 소비시키는 것이 정당 한가. 머리는 자라고 또 기르면 되는 것인데, 여기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제발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자, 얘야.
애초에 나의 주된 목적은 기분전환이였다.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들어갔으니, 당연히 결과가 맘에 안드는 거다. 나도 모르는데, 미용사가 어떻게 나를 100% 만족시켜 줄 수 있는가.
머리는 자란다.
연연 해할 필요가 없다.
....
그런데, 이런 경우는 삶에서 반복적으로 항상 일어난다.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삶.
공부를 하고, 회사를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정해진 길을 별 생각없이 걸어가다 돌뿌리를 만나면 항상 후회하고, 자책하고 남을 비난하고 세상을 탓하며.
무엇이든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혹은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나는 남편을 탓하고, 회사 상사 동료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며 잠시의 위안을 얻는다.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 살짝살짝 내면에서 출렁거려도 굳이 꺼내 드러내지 않고 꾹 눌러버린다. 불편한 상황을 남 탓으로 쉽게 모면한다.
이런 삶은 사실 무섭다.
나와 소통하지 않은 채, 본인의 책임을 묻지 않고, 남 탓하며 살다 보면, 결국 나는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 수 없다. 내가 뭘 원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아진다. 그저 왜곡된 상황을 현실로 세상의 이치로 받아들이며 왜곡된 삶을 살게 된다.
과거의 혼란스러웠던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시절 나는 나를 잘 몰랐다.
뭘 원하는지 모르니, 그 과정에 충실할 수 없었고,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보고 나서야 후회하곤 했다. 그러나 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치더라도, 애초에 뭘 원하는지 몰랐기에, 그리고 여전히 모르기에, 그 좋은 결과에 대한 기쁨도, 만족도, 감흥도 별 없이 삶은 무료하고 심심하며 불안했다.
원하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을 알기 위해 내면과 소통하는 것. 남에게 맡기지 않고, 내 마음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사색과 명상을 하고. 걷고. 남을 탓하고 비난하기 전에, 나의 마음을 자주 들여다보자.
오늘의 결론
머리는 자란다.
그리고, 평생동안 나와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만 하는 것도 너무 재미없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