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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매일이 감사

by 사십대 소녀

뇌하수체 종양 정기검진을 받으러 아침 일찍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왔다. 시간이 남아, 환자들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빌딩 안 어디 조용한 곳 없나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한적한 계단 한구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좋아하는 취향의 음악을 들으며, 이른 아침의 상쾌한 바람, 따뜻한 햇살, 덥지도 춥지도 않는 적당한 온기 속 줄 맞춰 서 있는 나무들의 푸르른 잎들의 무성함에 감탄하며, 차들로 북적거리는 도로와 바삐 움직이는 직장인들의 출근 모습을 버스안에서 바라보며.


여기 이렇게 살아있음에, 울컥. 감사함과 행복감이 밀려왔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은근한 압박감에, 이런 아름다운 햇살을 바람을 분위기를 너무나도 쉽사리 또 지나치고 있었구나. 무더운 여름이 오기전에 온몸으로 즐겨야 하는데.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씩은 시내에 나와볼까. 나와서 이런 역동적인 세상의 모습을, 삶의 일부를, 사람들의 모습을 느끼고 관찰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신촌 병원가는 길은 나의 회사 출근길과 같은 길이다. 15년을 지나치던 곳이였는데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운 빛줄기가 내리뻗는구나. 화창한 햇살 상쾌한 아침 공기 아래, 바삐 흘러가는 사람들의 출근길 속, 나 홀로 어색한 충만함을 즐긴다.


자유로움이 주는 선물. 시간에 대한 자율성을 오랜시간 동경하고 갈망했다. 여전히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나를 너무나도 자주, 항상 발견하지만, 한 스텝 한 스텝 틀 속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뭔가를 해보려는 소심한 발광, 내가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조금씩 발버둥치는 나를 꽉 안아주고 싶다.



걷고, 보고, 생각하고, 쓰고, 이야기하고 배우며. 두려움은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받아들여함을, 하늘아래 존재하는 인간은 다 동일한 인간임을. 비교할 필요도, 무시할 필요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존중하고 받아들이며,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에 따라 나아가면 됨을 사십대가 되어서야 진정으로 깨닫고 있다. 15년동안 나의 사회적 이름이자 불안정한 정체성에 많은 부분 기여했던 직업에서부터 시작, 그것에 대한 불만족은 돈으로 바뀌었다가, 곧 삶에 대한, 세상에 대한 질문, 호기심으로 옮겨 탔고 모든 것의 끝은 나란 존재의 원천, 각자가 지닌 종교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그렇게 깨닫고 있다.


세상 아래 나의 능력은 너무 작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다. 하늘 아래 개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한평생 겸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자유분방했던 대학교 생활을 졸업하고, 어른, 성인이란 딱지가 붙여지고, 회사라 불리는 인간들의 사회로 들어갔다. 회사란 조직에 합류 후, 당연히도 여러 힘든 점이 있었지만,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시간에 대한 제한이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활성화되기는 했지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간 까지의 노동시간. 그 안에 주어지는 1시간 안팍의 점심시간은 합당했지만 너무 짧았다. 특히나 봄, 가을 화창한 날 점심시간 이후 회사로 바로 복귀해야 하는 일상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그래도 다행 인건, 아니 불행인진 몰라도, 막상 들어가 문을 닫으면 견딜만 했다. 아름다움을 볼 시간도, 자연을 느낄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개인적으로 내게 주어지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짧았지만 무뎌 졌다. 자연히 날씨에, 자연에, 아름다움에, 그리고 시간에 무뎌 지고 그렇게 익숙해져 간다.


1년 넘게 놀다보니 여러가지 이유로 회사란 조직에 복귀하여 나를 불태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밀려온다. 어떤 직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돈을 버는 직업 중, 쉽지 않은 일은 없겠지만, 그러기에 회사생활도 역시 삭막하고 힘들지만 회사만의 매력도 충분히 있다. 1년 넘은 휴직으로 회사생활의 힘든 것들을 까먹기도 했지만, 그래서인지 다시 복귀, 이직을 하고싶다 가도, 시간이라는 보석 앞에서, 그 빛나는 보물을 회사에, 혹은 다른 누구에게 맡겨둘 수 있는가, 자율성을 포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앞에 난 주춤하고 가로막힌다. 자율성이 100% 보장되는 하루. 그것이 선물하는 가치를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내맡기지 못하겠는 것이 요즘의 심정이다.


여러 생각들이 양쪽을 밀리지 않게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지금의 생각이, 지금의 이 느낌이 한쪽 손을 명확히 들여올려준다.


지금까지 살았던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방법으로 한번 살아볼까.


돈 이상의 가치, 노동이 주는 의미를 소중히 여기고, 자연의 신비로움과 위대함 앞에서, 겸손하고 감사한 태도로 나를 배우고, 세상을 배운다는 자세로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만나는 것.


오랫만에 시내로 나오며, 뜨끈뜨끈한 햇살을 받으며 에너지를 받고 있다.

어서 빨리 피검사를 하고, 맛난 커피를 마셔야 겠다.




20210608.jpg 건강은 무조건 우선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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