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미스터 최

올해의 책_01

by 박기복

한동안 많이 바빴다. 많은 일들이 겹쳐서 일어났다. 학교에서는 학년말을 앞두고 마감해야 할 업무가 여럿이었고 집에 오면 세입자를 구하고 이사준비를 해야 했으며 틈틈이 가족 행사도 참석해야 했다. 업무는 한참 애를 먹이다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세입자는 아직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그 탓에 한두 달은 장거리 통근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두어 달의 바쁨 속에 행운이 있었다면 좋은 책을 몇 권 만난 것인데 고마운 추천이 있었던 덕분이다. 첫 번째는 <친애하는 미스터 최>라는 서간집이다. 일본 작가 사노 요코가 한국의 벗에게 보낸 40년간의 편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이라고 하면 단번에 설명이 될까. 사노 요코와 최정호는 1967년에 베를린에서 만나 친구가 된다. 그때부터 주고받은 편지는 무려 40년간 이어진다.


이 책을 추천해준 사람은 함께 근무하는 국어 선생님인데 '요즘 자기 전에 읽는 책인데 혼자 보기 아깝다'라는 게 추천의 요지였다. 이 정도의 추천이면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냉큼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고 단숨에 읽었다. 아껴 읽고 싶었지만 가독성이 너무 좋은 나머지 멈출 수가 없었다. 사노 요코가 쓴 편지글은 솔직하고 담백했으며 거스를 것 하나 없이 자유로웠다. 이렇게까지 솔직할 일이야? 글을 따라 읽다 보면 덩달아 물속을 헤엄치듯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통통 튀는 글에 반해가며 둘의 인연을 관찰하는 사이, 사노 요코의 마음이 궁금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사노 요코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최정호는 사노 요코의 (지금 표현대로라면) 남사친인 셈인데 순도 100프로의 우정만으로 40년간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국경을 넘나들며 편지를 주고받다 보면 없는 감정도 생길 것 같은데 말이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고 믿는 편인 나로서는 의심을 떨치기 어려운 상태로 책을 읽어 내려갔고,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본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마음을 드러내는 사노 요코를 향해 엉뚱한 말로 답장을 써대는 최정호가 얄밉게 느껴졌던 걸 보면 사노 요코에게 꽤나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40년간의 편지 교환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사노 요코의 투병과 죽음 때문이었다. 사망 5년 전에 보낸 편지가 마지막이었다. 책을 추천한 국어 선생님은, 편지를 쓰지 못한 그 5년간 사노 요코가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해봤다고 후기를 전했다. 나는 내 상상력의 부족을 탓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선 상상력이야말로 공감 능력의 토대일 텐데 내 상상력은 발이 없어서 정처 없이 부유하느라 겉핥기식 공감을 할 뿐이었다. 행간을 읽어내는 섬세한 독자처럼 나도 그 5년에 대해서, 그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먹먹해졌다. 사랑이 꼭 이루어질 필요는 없겠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무엇이 중하랴. 내 마음은 오롯이 내 것. 삶이란 그 자체로 좋은 것. (20221228)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