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책_02
내 글의 꾸준하고도 다정한 독자인 한 친구의 추천으로 나는 이 책을 만났다. 그는 수년 전부터 종종 '요즘 글을 쓰고 있냐'라고 물어봐주거나, 작가님이니까 이런 거 써야 한다며 만년필을 선물해 주고, 내 글을 빠짐없이 읽고 좋아요를 눌러주는 방식으로 나의 글쓰기를 북돋아주었다. 브런치를 시작한 올해를 기념하며 독자에게 감사인사를 해야 한다면 대표는 응당 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의 추천은 언제나 믿을만한 것이라서 이 책의 제목을 듣자마자 당장 읽고 싶어서 전자책으로 구입했다.
'어머니의 유고집을 펴내며'라는 제목을 단 서문에서부터 이미 결판은 나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내 안에서 뜨겁고도 축축한 것이 몇 번이나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울음이 날 것 같아서 구겨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펴야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에 태어난 이순자 작가는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시절을 살아왔다. 그 시절 한국에 살았던 가난한 여성들에게 자주 강요되었던, 자기 것을 내어주거나 갖고 싶은 것을 미련 없이 포기하는 일은 그에게도 익숙했다.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가 있었던 청각은 그를 경계인으로 살도록 만들었고 지병이었던 심장병은 일흔도 안된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삶에 있어서 패배자이거나 방관자였냐 하면 단호하게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혼생활 내내 이어진 남편의 폭력에 끝내 황혼 이혼을 선택하고 쉰넷에 딸의 권유로 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만학의 길을 걸었다. 쉼 없이 뭔가를 배우는 사람이었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끝없이 분투했다. 견고하게 고운 삶이었다.
온라인에서 이미 화제가 된 (물론 나는 알지 못했지만) '실버 취준생 분투기'라는 글은 취업 전선에 나선 노년의 여성이 겪게 되는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사실적이면서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고스란히 노력으로 따 모은 자격증들이 잔뜩 적힌 이력서가 오히려 구직에 방해가 되자, 중학교 졸업이라고 한 줄 적은 새 이력서를 내미는 장면에서 나는 울었다. 청소 노동자, 요양보호사, 어린이집 급식노동자로서의 경험담은 이 사회가 약자들에게 얼마나 지독한가 하는 민낯을 보여주었지만 그 속에서도 그는 결국 패배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 냈다.
가난한 집의 착한 딸로, 노동에 엄살떨지 않는 종갓집 큰 며느리로, 차별과 무시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청각 장애 경계인으로, 일자리를 찾아 고된 노동과 편견 가득한 시선을 감수하는 노년의 여성으로 녹록지 않은 삶의 무게를 견디면서도 주변을 살폈고 마음을 내주었다. 그래서인지 곁에 사람이 많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책에 생생하게 담겨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약자였던 그는 누군가를 도울 때만은 약자가 아니었다.
이웃집에 살았던 순분 할머니의 이야기는 기구한 삶의 전형이라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만난 한 남자의 이야기는 사람됨의 의미를 곱씹게 해서 며칠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구나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 삶 속에 내던져지지만 유독 어떤 이들은 사는 내내 지독하게 쫓기고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평소에는 잊고 지냈는데) 기어이 직면하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내가 끊임없이 책을 읽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아마도 더 잘 살고 싶어서일 것이다. 괴롭지 않게, 좀 더 수월하게 살고 싶어서, 나를 둘러싼 이 세계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는 매뉴얼(같은 것이 있다고 믿나 보다)을 찾아 책의 세계를 맴돌았던 것 같다. 나와는 다른 우주를 사는 타인의 눈에 비친 세상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자란다. 나를 뒤흔드는 책은 늘 나의 무지와 엄살을 일깨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읽으면서 크는 사람이다. 깨꽃 같은 이순자 작가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안온한 평화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2022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