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쉽다
우리는 예외 없이 언젠간 죽는다. 어차피 죽는데 뭐하러 열심히 사냐는 말은 어차피 배고파질 텐데 뭐하러 먹냐는 말처럼 헛소리겠지만 어찌할 도리 없이 삶이 헛헛하게 느껴질 때가 있고 나이가 들수록 그런 현상은 자주 찾아왔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서 오늘과 다를 바 없을 내일을 대비하는 삶. 그래서 내일이 전혀 궁금하거나 기대되지 않는 삶 말이다. 변화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고민은 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때가 언제인가를 찾아보는 일로 연결되었고 답은 어렵지 않게 도출되었으니 바로 여행이었다.
그럴싸한 여행지를 선정해 기분전환 삼아 다녀오는 일은 답이 아니었다. 일회성의 여행 따위에 삶이 꿈쩍이나 하겠는가. 나는 여행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여행하는 동안의 마음에 주목하기로 했다. 인생사 대부분이 그렇듯 이것 역시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여행자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여행은 시간과 비용과 열정을 들여야만 가능한 이벤트다. 여행자는 여행을 망치지 않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사소한 불쾌한 일쯤은 기꺼이 떨쳐내고 여행하는 지금 이 순간을 누리겠다는 각오, 눈앞에 놓인 풍경에 집중하자는 다짐, 부지런히 움직여 명소와 명물은 한 번쯤 기웃거려본다는 결심과 노력. 이런 마음들이 여행자의 내면을 채운다. 바꾸어 말하면 여행자는 행복할 준비, 감탄할 준비가 되어있는 존재들이랄까. 물론 이런 부산스러운 노력이 가능한 이유는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시한부이기에 집중력을 발휘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만하다. 그렇다면 의아하다. 인생은? 인생이야말로 시작과 끝이 있지 않은가? 느닷없이 시작해 언제 끝날지 모른다(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까먹는다)는 것만 다를 뿐.
월요일부터 금요일 퇴근할 때까지를 4박 5일 일정의 여행으로,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를 2박 3일의 여행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일주일을 6박 8일로 살 수 있는 매직이 펼쳐진다. 늘 오가던 집과 직장이 새롭게 느껴진다. 늘 보던 하늘이, 늘 하던 일이 조금 달라 보이고 오늘은 좀 다른 걸 먹어볼까, 좀 더 이쁘게 입어볼까 마음도 쓰게 된다. 지금은 여행 중이므로 일단 이번 여행만 잘 마치자고 생각하다 보니 다음 달의 과제나 풀리지 않는 고민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나빠지려는 기분을 냉큼 털어내는 작은 노력 딱 그만큼만으로도 일상을 살아내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덕분에 작년 11월, 12월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올해부터는 브이로그를 찍기 시작했는데 1 여행 1 영상이 원칙이다. 사진을 찍는 대신 1, 2초 길이로 영상을 찍은 후에 동영상 편집 어플을 이용해 이어 붙인다. 편집에 걸리는 시간은 10분 남짓(참 쉽죠잉). 편집 영상의 총길이는 1분을 넘지 않는다. 4박 5일의 주중 영상들은 weekdays라는 사진첩 폴더에, 2박 3일의 주말 영상들은 weekend에 차곡차곡 쌓인다. 브이로그까지 찍으니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설정이 단순한 정신승리를 넘어선다. 영상은 숨결과 움직임을 포착하고 머무는 공간의 소음마저 잡아낸 덕분에 생동감이 넘친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던 내가 살아낸 시간들이 동영상 파일의 물성을 띠고 단단히 붙잡힌다.
2022년 12월 31일 우리 집에서는 VIP시사회가 열릴 것이다. 52번의 주중 여행과 52번의 주말여행이 100분 남짓의 영상으로 기록되어 재생될 것이다. 영상의 제작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맛있는 술안주들을 늘어놓고 영상을 시청할 것이고 그 사이 내가 내 삶의 Very Important Person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될 것이다.(20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