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이 쓴 책이 아닙니다
작년이었나, 정식 출판되지도 않은 책이 제본이 되어 알음알음 퍼져 읽히고 있는데 내용이 괜찮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어느 부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법'이라고. 부자로 사는 일은 언감생심 나의 소망 영역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을 뿐이었는데 3월의 어느 날 급식을 먹다가 바로 그 책이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거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그 책을 보았을 때 나는 책표지를 들춰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일본 작가가 쓴 뻔하디 뻔한 자기 계발서려니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책의 저자는 세이노상이 아니라 Say No라는 필명의 어느 부자였고 이미 20년 전쯤 쓰여 많은 이들이 제본해서 돌려보던 글들을 최근에 어느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펴낸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호기심이 폭발하듯 일어났다. 당장 구입하려고 검색해 보니, 꽤나 두꺼워보이던 그 책의 가격이 고작 7,200원이고 심지어 전자책은 무료가 아니던가?
냉큼 다운로드하여 읽기 시작했는데 손에 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부터 마치 초반 5분을 보고 이 영화가 걸작이겠구나를 판단하듯 이 책이 기어이 출판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놀라웠다. 세이노라는 사람이 풀어내는 이야기도 놀라웠지만 그 이야기에는 힘이 있었다. 문체 자체가 갖는 특징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 힘의 원천은 세이노가 실제 천억 대 자수성가형 부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처하여 조선일보와 출판사 편집부 합동 재산 인증 과정을 거쳤다고 하니 '자칭' 부자라 떠드는 이들, '본인도 부자가 아니면서' 부자를 만들어주겠다고 호기롭게 떠드는 빈수레들을 향해 세이노가 내보이는 조롱 같기도 하다.)
책의 표지에는 '피보다 진하게 살아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건 그가 이십 대 초반 사업에 실패하고 절망 속에 자살 기도를 했다가 자기 손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빨간 피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는 일화와 연관되어 있다. 이 책에는 그가 바닥에서부터 일어나 절망을 딛고 어떻게 성취를 일구어냈는가, 얼마나 지독하게 노력하고 인내하였는가 하는 서사가 흥미롭게 담겨있다. 부자로서 누리는 현재의 삶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첫 번째는 책이 출판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역사였다. 동아일보에 칼럼을 쓰던 세이노라는 필명을 가진 저자에게는 곧 추종자들이 생겼고 그들이 만든 카페에 2003년부터 글을 한편씩 올리기 시작한 것이 무려 735페이지에 달하는 책으로 묶여 나오게 된 것이다. (정식 출판에 맞춰 2022년에 새로 쓰거나 고쳐 쓴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출판 제안을 뿌리치고 제본비 선의 가격을 제안한 출판사와 판매 수익 기부를 조건으로 2023년에 비로소 정식 출판하게 된 것인데 지식을 나누는 데 일체의 비용을 받지 않겠다는 신조 또한 눈길을 끈다.
두 번째는 일단 글 자체로도 훌륭하다는 점이다.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글이 막힘 없이 술술 읽힌다. 단호하고 직설적으로 귓전을 때리는 것 같은 내용은 저자가 읽은 책, 경험한 사례들과 버무려져 설득력을 얻는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도 자주 등장하고 저자 역시 평소에 독서를 즐기는 사람으로, 단순한 다독이 아니라 자신만의 효율적인 독서법을 가진 독서가라는 것이 느껴졌다. 세이노가 부자가 된 비결은 시대를 읽어내는 독해력, 뛰어난 판단력과 문제해결력일 텐데 그 원천의 일부는 분명 독서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세 번째는 부자 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도움 되는 조언이 가득 담겨 있다. 한때 자기 계발서깨나 읽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이 책에는 분명 남다른 구석이 있다. 태도, 자세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자칫 추상적, 관념적으로 이야기가 흐르기 쉬운데 그의 조언은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다. 점잔 빼지 않고, 중간중간 독자를 향해 '돌대가리', '새대가리' 같은 원색적 비난 표현도 던지는데 적어도 나는 그 점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 그런 표현이 응당 어울리는 맥락에서만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끼는 동생이 답답한 소리나 해대고 있을 때 등짝 한 대 휘갈겨주는 진심 같달까.
그래서 결국 세이노의 가르침이 내게 남긴 것이 무엇이었나. 나는 올해 초 한동안 '한량'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고요하게 살고 싶다고도 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건 내가 지금껏 너무 애쓰며 아등바등 살아왔다는 투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안의 어떤 어두웠던 부분이 밝아졌다. 내가 사실은 내내 더 열심히, 더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전부를 긍정하기로 했다. 아등바등하는 것은 찌질한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 열심히 열심히 더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고 싶은 마음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그런 마음을 자극해 준다.
이 책의 영향으로 나는 '한량'에 꽂혀있던 관심의 화살을 빼내 새롭게 '경험'에 꽂았다. <세이노의 가르침>의 남다른 구석은 저자 본인의 경험치가 놀라우리만치 방대한 데서 비롯된다. 수많은 사업을 하면서 겪은 숱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건져 올린 노하우들의 총체. 그게 이 책의 위력이다. 책을 읽은 직후 한 두 달은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 안 해본 것을 해보자는 생각에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갑자기 음악회를 예매하고 1일 명상 프로그램을 신청한 것도 그 영향 아래 있을 것이다.
온실 속 화초처럼 제한된 경험만을 하고 산 자신이 한탄스러웠다가 지금은 조바심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내가 무기력과 싸워 이기려고 노력한 시절들도 '경험'의 프레임으로 보니 퍽 봐줄 만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지 않은 것도 다행한 경험이었다.(풋!) 허무함과 싸웠던 시절, 권태를 견뎠던 시절, 자기혐오의 계절도 마찬가지였다. 파랑새를 찾으려고 모험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파랑새는 내 집에 있더라는 식상한 서사처럼, 내가 가진 경험들을 긍정하게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경험을 억지로 찾기보다 나와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에세이를 찾아 읽는 것으로, 다른 삶에 대한 궁금증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완해보려 한다.
틈이 날 때마다 리더기를 꺼내 이 책을 읽던 봄날이 생각난다. 3월의 봄꽃을 보러 떠난 나들이길, 광양의 매화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줄을 서서도,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의 실타래처럼 얽힌 긴 줄에서도 이 책을 읽었다. 놓지 않고 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궁금했다. 20대 때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삶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10대 자녀를 둔 부모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녀를 둔 친구들에게 특히 추천했다. 종이책 두 권을 사서 남편과 그의 사업하는 절친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둘 다 고맙게 받고 읽지는 않은 듯하다.) 가르침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건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한 번쯤 들어봄직한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2023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