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수밖에.
지난 3월 이사 후 책장을 새로 정리하면서 좋아하는 책들을 따로 모아두었다. 나름 '명예의 전당'이랄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도 그중 한 권인데, 예전에 써둔 서평을 발견하고 다듬어 올린다. 출판된 지 이미 4년이 지났지만 좋은 책이니 추천하는 마음을 담아. (그리고, 이렇게라도 새 글을 업로드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몇 해 전 여름휴가를 맞아 남편과 베트남에 갔을 때의 일이다. 밤늦게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까지 택시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차 밖으로 나와 호객행위를 하는 기사들 중 한 명과 택시비를 흥정했다. 거래가 성사되자, 기사는 차도에 늘어선 택시들 중 한 대가 아니라 어두컴컴한 주차장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자가용으로 영업을 하는 무허가 택시였던 것. 깜짝 놀란 나는 기사를 따라나서는 남편을 잡아세웠다.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남편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어 보였고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도 무서운 상상은 계속되었지만 결국 저렴한 가격으로 안전하게 호텔에 도착했다.
만일 나 혼자였거나 동성 친구와 함께였다면 그 기사를 따라 가로등마저 꺼진 어두운 주차장으로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남편은 어째서 이렇게 겁이 없을까? 내게는 이 일이 꽤나 충격적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놀랄 일이 아니었다. 특별히 용감한 남자라서가 아니라 '남자'라서 그렇다는 것.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같은 나라에서 살아왔어도, 엇비슷한 가정환경과 엇비슷한 교육 수준을 지녔다 해도 남자인 그가 만나온 세상의 온도와 공기는 나의 것과는 달랐을 터다. 여성인 내게 이 세상은 ‘험한’ 곳이라서 언제든 나는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택시를 타면 절대 잠들 수 없었고 으슥한 길은 멀더라도 돌아서 갔다. 남자들은 술 마신 뒤 택시를 타면 으레 잔다는 얘길 처음 들었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이 세상은 완전히 다른 곳이다. 내 눈에 훤히 보이는 걸림돌이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서 있는 곳이 기울어졌는지 평평한지” 살피지 않는다면, 평범한 사람으로서 내가 누리는 ‘특권’이 무엇인가를 예민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차별의 가해자가 될 확률이 높다. 저자는 1부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며 고정관념을 갖기도 경계 너머의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쉽기에 당신이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주장에는 맞설 도리가 없다.
2부에서는 차별이 어떻게 지워지고 위장되는지를 보여준다. 유머를 가장한 혐오와 차별은 그나마 난도가 낮다. 알아차리기도 대응하기에도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약자를 비하하는 개그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미 많고 저자의 지적대로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그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줄 수도 있다. 정작 어려운 것은 얼핏 공정해 보이는 차별이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달리 대응해야 한다는 능력주의 관점은 근거가 있고 공정해 보이지만 종종 편견과 단단히 결합되어 많은 사람들을 쉽게 차별에 노출시킨다. 토드 로즈는 <평균의 종말>에서 이른바 ‘들쭉날쭉의 원칙’을 제시하며 인간의 개개인성이 얼마나 다차원적인가를 설명한 바 있다. 오늘날 사회적 보상의 기준이 되는 ‘능력’이라는 것이 인간의 개개인성을 얼마나 다차원적으로 측정한 결과일까를 생각해 보면 저자의 말대로 능력주의는 공정한 규칙이 아니다.
이 책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향한 차근차근한 여정이다. 친절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선량한 사람들의 선의만으로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고 설득한다. 그리고 묻는다.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불편함을 견딜 것인가?”
고단하다. 대한민국에서 오늘을 사는 내가 부쩍 자주 느끼는 기분이다. 지쳐서 피곤하다. 마치 초록불이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뒤늦게 통과할 때처럼 일단 대열에 합류할 때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다. 야속하게 등만 보이며 달려가는 누군가를 따라 걷고 뛰어야 한다. 최근 들어 서점가에 이제 그만 애쓰라는 식의 책들이 범람하는 것만 봐도 나 같은 사람들이 꽤 많은 듯하다. 이 고단함은 무엇 때문일까.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아프거나 실패하거나 어떤 이유로건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라는 저자의 말은 차라리 위로에 가깝다.
하루에 세 가지씩 감사일기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자꾸만 바닥을 드러내는 자존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내가 누리는 감사한 것들을 일깨워 수첩에 눌러 적으며 나를 토닥였다. 다른 사람은 누리지 못하는데 나는 누리고 있으니 감사하자는 태도가 우월감과 무엇이 다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우월감은 타인과의 비교에 기반하는 것이라 너무 위험하다. 일단 비교의 문을 열어놓고 살면 열등감이라는 불청객도 슬며시 들어와 그저 몇 걸음 올라서려는 나를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내가 존엄한 까닭은 뭔가를 가져서도 누려서도 아니다. 원래 모든 인간은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존엄하듯 나도 그러하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존엄이 유지되는 세상에서 나 역시도 존엄하고 그들이 안전한 세상에서 내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차별'당하고' 차별하기 '쉬운' 사람임을 인정하는 딱 그만큼 이 사회는 차별에서 멀어질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부끄러웠다. 그래도 피부로 느끼는 인권 감수성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희망이 있다는 소리다. (2020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