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복의 널뛰기_제2화
여기 돼지 한 마리가 있다. 먹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돼지다. 우리 안에서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뿐더러 주인이 주는 먹이를 잘 받아먹어 살이 포동포동 오른 이 돼지는 배불리 먹고 바닥을 뒹굴다가 잠이 드는 것이 가장 행복했다. 이 돼지를 A라고 하자.
어느 날, A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계기에 의해 '각성'한다. 말하자면 생각 없는 돼지에서 생각하는 돼지가 된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더니 문득 이런 곳에서, 이런 것을 먹으며, 이런 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어쩌다 이런 삶을 살게 된 건지, 갇혀서 먹고 자는 일상이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뜬금없는 돼지의 등장으로 짐작했겠지만 나는 한때 나 자신을 각성해 버린 돼지라고 생각했다.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동물 중 하나로 돼지를 골랐을 뿐, 돼지나 나 자신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나에 대해 더 자주, 더 골똘히 생각하게 되면서 뒤늦은 방황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지난 글(지랄총량의 법칙을 아시나요)에서부터 하던 참이다.
자, 이제 A에게 놓인 선택은 두 가지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나오는 돼지처럼 봉기를 일으켜 신세를 뒤바꿀 수도 있다. 아니 봉기 같은 거사도 필요 없다. 조용히 우리 밖으로 탈출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물론 여기엔 위험이 따른다. 봉기든 탈출이든 실패할 확률은 높고 어쩌면 명을 재촉할 수도 있다.
A가 할 수 있는 두 번째 선택은 살던 방식 그대로 묵묵히 사는 것이다. 다만, 자신과 자기를 둘러싼 환경이 모두 문제투성이로 보이기 시작했으니 행복할 리 없다. 해맑고 천진하던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A는 이제 포동포동한 자신의 D라인도, 식을 줄 모르는 먹성도 싫다. 좁고 답답한 우리 안에서 갑갑함을 느낀다.
결국 A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다. 변화를 위해 도전할 용기, 위험을 감수할 용기, 그래서 마침내 현실을 바꾸고 말 바로 그 용기 말이다. 우리 바깥세상을 궁금해하고 그 호기심을 동력 삼아 뭔가를 도모할 용기가 없다면 각성한 A의 삶에 남은 것은 불행뿐이다. 도축될 날이 얼마 남지도 않는 돼지 한 마리가 한 치 앞도 모르고 고뇌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짠하기까지 하다.
다행한 일은, 탈출하지 못한 A에게 아직 남은 선택지가 하나 있다는 거다. 용기가 없는 것을 인정하고, 지혜를 갖추면 된다. 돼지로 태어난 자신이 가진 특성(아름다운 D라인과 꺾이지 않는 식욕 같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긍정할 줄 아는 지혜 말이다. 지혜로운 A라면 우리 안의 삶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돼지들과 오순도순 추억도 만들고 오늘 저녁 사료는 뭘까 궁금해하면서.
쓰다 보니 돼지 이야기에 너무 몰입해 버렸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하다. 나는 각성은 했을 망정 용기도 지혜도 없었다는 것. 나와 내 삶이 만족스럽지 않고 뚫린 구멍 같은 것을 눈치채 버렸는데 그 구멍의 정체를 밝히거나 메우려고 노력하기는 귀찮았다. 다만 구멍의 존재가 너무 거슬려서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내가 쥐고 있던 게 고작 껍데기였다는 것과 생각을 하면서 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진짜 생각'이라는 걸 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질문할 줄을 몰랐다. '왜'를 따져 묻지 않았고 늘 순응했다. 주어진 것을 남들보다 잘하고 싶다, 그래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고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명백히 '독'이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느끼면서 나를 지탱하던 자부심 같은 것이 조금씩 닳아져 갔다. 이 삶에 이르기까지의 선택과 노력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는데 지나온 과거를 싸잡아 평가 절하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 많고 행복하지는 않은 돼지가 되었다. 이미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기꺼이 수용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지혜로운 돼지였다면 어땠을까.
어쩌랴, 일어날 일은 기어이 일어나고 겪어야 하는 일은 오롯이 겪을 수밖에. 지금에 와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초월한)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보자면, 그저 용기든 지혜든 둘 중 하나라도 있다면 조금은 덜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의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움켜쥔 것이나마 잃을까 봐 무서워서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움켜쥔 것이 그리 귀하다면 불행할 이유가 없었으니 그저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하여 나는 투명한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기분인 채로, 인정에 목말라하며 일희일비를 일삼는 기복이가 되었고, 나를 구하고자 온갖 심리학 서적을 읽어대기 시작했는데 지나고 보면 그건 번지수가 영 틀린 해법이었다. (20231214)
3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