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 총량의 법칙을 아시나요

박기복의 널뛰기_ 제1화

by 박기복

당신은 지금 드라마 시청 중이다. 인물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국면. A의 돌출 행동을 목격한 B가 A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자, 다음에 이어질 B의 대사가 무엇일까. 난이도가 너무 낮은가?


-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


B의 입에서 위의 대사가 흘러나올 때면 나는 다소 질리는 기분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나 자신의 나다움에 대해서 슬며시 떠올려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인간 박기복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 말이다. 다만, 늦어도 한참 늦은 질문이었으니 사정은 이러했다.


가정 시간이었나. 청소년기에 자아정체감이 형성된다고 배웠지만 10대 시절의 나는 자아정체감이 시험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내 정체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할 생각은 못했다. 매일 해치워 넘어야 할 허들, 도달해야 할 결승점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으니까.


대학에 합격하고 아 이제 다됐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던 것도 잠시, '새로운 스테이지가 시작되었고 경쟁은 첨예해졌으니 또다시 전력을 다해 달려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고 믿는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나무꾼 마냥 아프고 속상했다.


별 수 있나. 낙오되지 않으려고 다시 고군분투했으니 사범대 학생의 자연스러운 도착지는 교사였다. 안정적인 직장도 구했겠다 본격적으로 인생을 즐겨볼까 했는데 이제 좀 교직이 할 만하다 싶기까지 좌충우돌하느라 또, 한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서른 즈음에. 가수 김광석이 멀어져 가고 비어져가고 잊혀간다고 읊조리던 그 서른 즈음에, 박기복의 자아정체감이 꿈틀 하기 시작했으니. 사는 동안 결승선 같은 건 없으며 인생은 징그러울 정도로 과정 그 자체라는 걸 받아들인 무렵이다.


내 생각, 내 욕망인 줄 알았던 것들이 실은 나의 것이 아니었으며 자각도 못한 채로 타인과 사회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왔을 뿐,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궁금해본 적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낭패감이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열심히 읽기 시작한 것이. 나는 각성했고 어쩌면 너무 진지해져 버렸던 것도 같다. 생각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무딘 감각이 섬세해질수록 사는 건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실제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내 기분이 그랬다. 갑자기 생의 난이도가 올라갔고 고민이 시작되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았다. 뒤늦은 사춘기였다.


물론 이러한 서사는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는 질문에 이어지는 나다운 게 뭐냐는 호소처럼 아주 뻔한 것임을, 주변 친구들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이곳 브런치에 올라온 여러 글 속에서도 확인했다. 획일적이고 강압적이던 사회 분위기, 치열한 입시 경쟁이라는 환경에서 양산될 수 있는 흔한 인간형. 그 복제품들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내가 쓴 건가, 내 속에 들어왔다 나갔나 싶은 고백들을 읽으며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고, 그게 은근한 위로가 되었다...는 말은 지금에야 할 수 있는 말일뿐. 내가 요즘 왜 이러지? 난데없이 쟤가 왜 저러냐? 한탄과 원망의 뒤섞임 속에서 나는 허둥댔다.


어떤 이들은 10대를 요란하게 보내고, 나는 30대에 고민과 방황을 했다. 살면서 떨 지랄의 총량은 정해져 있으니 누구나 살면서 한 번은 지랄을 떨게 되어 있다는 이른바 '지랄 총량의 법칙'. 처음 들었을 땐 피식 웃고 넘겼는데 응당 '법칙'이라 불릴 만큼 보편성을 확보한 것임을 내가 몸소 증명해 보였다. 지랄 총량의 법칙을 처음 발견한 이는 마땅히 현자다.


뒤늦게 찾아온 질문과 방황에 맞서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결실 중 하나는 내가 '노력'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더 정확하게 바꾸어 표현하면 나를 굉장히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큰 힘이 됐다. 물론 알아차리기까지도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방송에 출연한 한 시인이 그런 말을 했다. 거창한 것, 사랑이니 슬픔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쓰려면 아득해지지만 오늘의 슬픔, 오늘의 사랑에 대해서라면 쓸 수 있다고. 내가 오늘, 지금 꼭 해야 할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면 바로 이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다움을 찾아 헤맨 지난 세월의 허둥지둥과 헛발질들.. 나에게 제일 도움이 될 테지만 누군가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20231211)


2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