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복의 널뛰기_제4화
번 아웃 상태에 직면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어쩌다 이리되었나를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직업이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고 느꼈다. 엉뚱한 지점에 불시착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지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서 온 길이 아니라 사회가, 학교가, 선생님이, 부모님이 좋다는 길을 따라 생각 없이 떠밀려 온 자리였다.
모든 것은 수능 성적에서 비롯되었다. 400점 만점이었던 수능 시험에서 300점이 넘으면 서울대를 합격한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불수능이었다. 소위 '스카이'라 불리는 학교를 써볼 만한 점수는 되었지만 학과를 고를만한 점수까지는 받지 못한 나는 가군에서 문과대 낮은 학과를, 나군에서 사범대 역사교육과를 지원했다.
점수가 5점 정도 높거나 낮았다면 이야기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5점이 높았다면 학과 선택의 폭이 넓었을 테고, 5점이 낮았다면 아예 다른 학교의 인기 학과로 진학했을 것이다. 애매한 점수를 두고 대학 간판이 욕심나서 사범대를 선택했고 그게 인생 항로를 결정지었다. 원서를 쓰기 직전 담임 선생님과 마주 앉아 나눈 그 간단한 대화가 인생의 결정적 장면이었다니, 그땐 전혀 몰랐다.
원했던 문과대에 낙방하고 사범대에 오게 되었다. 학교 이름은 괜찮은 포장지였다. 부모님에게 자랑할만한 딸이 되었고 명문대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며 다니는 대학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에 속은 기분이긴 했지만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놀았다. 뭐가 되겠다는 포부를 품을 틈도 없이 IMF사태가 터졌다. 안정적인 직업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사대를 다니면서도 꼭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물론 교직을 희망한 적도 있지만 중학생 시절의 얘기였고, 막연하게 방송 PD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막연한 관심에 그쳤다. 3학년이 되자 결단을 내려야 했다. 교직을 희망하는 친한 친구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전화로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다 이룬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십수 년이 지나 도착한 지점은 5일을 견디는 삶이었다. 나는 출근만 하면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주말만을 기다렸다. 2일은 자유롭고 행복한데 5일은 불행을 견디거나 외면하는 삶이었다. 쉽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처럼 품고서 학생들을 마주했다. 교사라면 마땅히 할만한 말과 행동을 흉내 내느라 녹초가 되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교육 환경이 급변하면서 내가 더 이상 근사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고생스럽더라도 누군가의 앞날에 보탬과 응원이 되는 일을 한다는 보람은 조금씩 사그라졌다. 특히 고3을 몇 년 맡으면서 진과 흥이 모두 빠졌다. 체력은 떨어졌고 입시라는 필터로 모든 게 걸러지는 통에 '도구'로 전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어떤 아이들은 필요에 따라 눈빛을 바꾸었다. 감정의 소모는 가장 큰 에너지 도둑이었고 나를 떠받치던 효능감은 뚝 떨어졌다.
교사가 되라고 누구도 대놓고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했으니 책임도 내 몫이었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도망치기는 싫었다. 대안 없이 안전한 울타리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모든 상황이 실망스러웠지만 나에게까지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빠져나간 에너지를 채워 잘 기능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몇 차례 심리 상담을 받았다. 상담은 큰 효과가 있었다.
상담을 통해서 내 생각이 작동하는 방식이 잘못 굳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 아니면 도 식의 이분법적 사고가 문제였다. 잘했다와 망했다 사이에 '그럭저럭 하다', '그저 그렇다' 등도 있는 법인데 나는 매사를 성공과 실패, 둘로만 갈랐다. 기대는 높았고 자주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상담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가르쳐 주었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야기를 다르게 편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나는 본질을 놓쳤다. 상담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만 했다. 나를 분석하고 단점을 찾아내 바꾸고 개선하면 다시 전처럼 만족하며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심리학 책을 즐겨 읽었다. 내 심리가 작동하는 비밀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일시적인 위안을 받았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했는데 실은 책 탓이 아니라 내 탓이었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삶의 모든 순간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다정한 마음이었다. 내가 읽었던 심리학 책들에 그런 내용이 없었을까. 분명 있었을 것이다. 다만 눈으로는 읽었어도 마음까지 와서 닿지 못했던 것뿐이다. 가르침을 알아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참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났다. (20231222)
5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