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복 Dec 30. 2023

나는 물질이었다

박기복의 널뛰기_제5화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종일 누워서 지낼 줄은 몰랐다. 전날 아무 이상 없이 잘 먹고 잘 잤는데 아침부터 갑자기 속이 안 좋더니 빈속에 몇 번이나 구토를 했다. 위장이 뒤집어졌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상태이려나 싶었다. 배고픔은 느낄 겨를도 없었다. 갈증이 나서 겨우 물을 마시면 또 구토를 했다. 내내 누워서 보냈고, 열몇 시간을 자고 나서 씻은 듯 나았다.


위장이 뒤집어지는 불편감이 지속되는 동안 나의 정신은 온통 위장에 가 있었다. 평소에는 뱃속에 잘 있는 줄도 모르는 기관이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육체의 고통 앞에서 크리스마스이브니 휴일이니 하는 사실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군침을 흘리며 보던 맛집 소개 방송은 오히려 고문이었다. 새삼 깨달았다. 나는 정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몸이고, 물질 덩어리였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권태를 넘어 무기력을 향해 가던 시기의 나는, 여전히 정신이 육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심리학 책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현상의 원인에 집착하고 간단히 남의 입에서 나온 해결법을 듣는 일은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했다. 나중엔 철학 책을 읽었다. 근본적인 것-삶이니 존재니 하는 것 말이다-에 포커스를 두는 사이, 잠시나마 자잘한 어둠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실, 자잘한 걱정과 불안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몸을 쓰는 일이었다. (이때는 아직 몰랐지만) 몸의 감각에 집중하다 보면 부정적으로 흐르던 잡생각이 사라졌다. 나중에 만난 심리상담사의 이야기를 빌자면 사고방식은 마치 들판에 길을 내는 일과 같아서 반복하는 사이에 저절로 이루어진단다. 길이 나 버리면 왕래는 잦아지고 좁았던 길은 점점 넓어진다. 이 상황에서 다른 길(긍정적인 사고 회로)을 새로 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


언제부턴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고민거리가 내게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치우친 생각들까지 더해졌다. 더 문제는, 이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거다. 나는 왜 괴로운가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이 온통 그늘 밑에 있었으니까. 자신의 팔, 다리, 몸통이 어떤 모양으로 움직이는지도 모른 채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기본부터 엉망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책이 김주환의 <회복탄력성>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내용이 알차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됐다. 전에 없이 노트를 펼쳐 주요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 한 권으로 인생이 단박에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캄캄한 방에 탁 켜진 전구처럼 그 책은 많은 인사이트를 주었다. 아니 내가 불 꺼진 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줬다는 비유가 더 적절할 것이다. 노트에 써둔 메모를 종종 읽었다. 2015년의 일이다.


시간이 한참 흘렀고 그 사이 여러 노력들을 이어 나갔다. 몸과 정신이 아주 밀접하다는 걸 믿기 시작한 후로 명상 수업을 받았고 제대로 운동을 해보려 PT를 받기 시작했다. 자아 탐구 차원에서 명리학 서적을 탐독하고 명리 강좌를 찾아 듣기도 했다. 이런 노력들의 결론은 혼돈과 무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안 되는 시기가 있는 법이고 그걸 사람들은 흔히 운이라 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성장의 관점에서는 필연이고 명리학의 관점에서는 순환의 한 과정일 뿐이었다.


나는 때로는 괜찮았고 때로는 괜찮지 않았다. 2일은 행복하고 5일은 쉽게 불행에 빠지는 삶을 이어 나갔다. 터널을 통과해 나왔구나 싶었다가도 가끔은 우중충한 공기가 주변을 맴도는 기분을 느꼈다. 고맙게도 나는 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개운해지고 가벼워지기 위해 뭔가를 계속 시도했으니 내 취미는 노력이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을 만났다. 2022년 겨울이었다.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이었다. 화면에 얼굴을 드러낸 강연자의 이름이 김주환이라고 했을 때 바로 수년 전 읽은 책 저자와 동일 인물임을 알았다. 올 상반기에 나는 누굴 만나든 김주환 교수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뇌과학에 기반한 내면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자, 그러면 나를 사로잡은 편도체 얘기부터 시작해 볼까. (20231230)


6화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대학 간판이 욕심나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