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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배우 이선균을 추모하며

by 박기복

어제는 일이 많아서 퇴근이 조금 늦었다. 주차장에 내 차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을 볼 때는 어쩐지 쓸쓸하다. 언제 온 눈인데 아직도 남아 미끄러운 바닥을 조심조심 살피며 차에 탔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차에 연결하고 유튜브 뮤직앱을 연다. 갑자기 생각난 한 곡, 듣고 싶은 한 곡을 입력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알아서 추천곡이 재생된다. 실망스럽게도 나는 퍽이나 예측가능한 인간인지 이어지는 노래들이 족족 심금을 울린다.


요 며칠 입력했던 첫곡은 '당신만이'였다. 심지어 '이치현', '당신만이' 두 단어를 연속해 입력했는데 이치현과 벗님들의 당신만이를 선곡하기 위함이다. 눈부신 햇살이 비춰주어도 제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감미로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해도 달도 무용하게 만들어버리는 오직 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때론 그 오직 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을 가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나를 들어 특정한 시간으로, 장소로, 누군가의 옆으로 데려가준다. 일순간에 기분을 바꿔주기도 한다. 음악에 따라 차분해지기도, 들뜨기도, 감정이 고조되기도 하는데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화나 드라마들에 열심히 배경 음악을 까는 걸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음악이 미치는 영향은 꽤나 큰 것 같다.


어제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흘러나온 노래는 전부터 즐겨 듣고 좋아하는 곡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클라이맥스 부분을 따라 불렀다. 이제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면 비보호 좌회전을 해서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갈 터였다. '눈을 감아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남편이 과장된 가성으로 불러 웃기려고 하는 대목을 혼자 따라 부르다 문득. 그제야 알아차렸다.


화면에 떠있는 노래 제목은 무심했다. 어른. 가수는 손디아. tvn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대표적인 ost곡이다. 음악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라 나를 울리고 웃긴 드라마 장면 여러 개가 순식간에 휙 스쳐 지나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생드라마로 꼽고 있는 그 드라마를 나는 본방을 챙겨가며 보았다. 드라마를 대표하는 곡의 제목이 어째서 '어른'인지 드라마를 보면 알게 된다. 주인공을 맡은 남녀 배우의 나이 차가 커서 방송 초반에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나의 아저씨는 애인을 부르는 애칭의 하나가 아니라, 좋은 어른을 향한 친근한 호칭이다.


왈칵. 눈물이 났다. 음악이 불러 모은 드라마의 장면들 속에 주인공 박동훈을 연기한 배우 이선균이 있었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위기를 겪고 있던 박동훈이 이지안의 좋은 어른이 되어주는 사이, 자신도 함께 성장해 가는 이야기는 이선균의 연기 속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주목을 받던 이가, 온 세상의 눈총을 받다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본질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경계를 넘어가면 다시는 만날 도리가 없다는 것. 그 야속함이 만져질 듯 선명해서 눈물이 자꾸 났다.


열렬한 팬까지는 못되더라도 그의 연기를 좋아했다. <나의 아저씨>는 말할 것도 없고, 김민희와 함께 찍은 영화 <화차>는 여러 번 봤다. 홀연 사라진 애인을 찾으려 동분서주하다가 감당하기 힘든 진실 앞에서 흔들리는 이선균의 연기가 좋았다. <커피프린스 1호점>의 최한성도, <하얀 거탑>, <골든타임>의 의사 이선균도 좋았다. 최근 영화관에 가는 횟수가 부쩍 줄었음에도 평일에 굳이 <잠>을 보러 간 데에는 이선균에 대한 호감도 한몫 했다.


느닷없이 보도된 충격적인 소식에 나는 쉽게 실망해 버렸다. 논란의 중심에 서고 추문의 주인공이 됐을 때는 차라리 외면해 버렸다. 연일 뉴스에 기사가 도배되고 말도 안 되게 사생활이 까발려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기는 했지만 본인이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몫이 분명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워낙 선량한 분위기를 가진 터라 난도질당한 이미지를 추슬러 재기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세상을 등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의 선택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여러 말이 있는 것으로 안다. 다만,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확실한 건 이미 지나치게 과한 대가를 치렀다는 거다. 최진실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 충격적이다. 톱스타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등지는 극단적인 서사의 중심에는 대중이 있다. 넘치는 사랑과 관심에 비례하는 폭발적인 비난과 질타. 가끔씩 최진실을 생각하듯 살면서 종종 이선균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지난 십수 년간, 연기로, 작품으로, 그가 나에게 준 위로는 아주 분명한 것이었다. 감사하다. 부디 편안해지셨기를. (20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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