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깨달아버렸어요
우리 집은 일요일마다 재활용품을 내다 버린다. 보통은 저녁에 하는데 오늘은 남편이 운동가는 길에 버리겠다고 하기에 오후 3시에 음식물 쓰레기를 챙겨 따라나섰다. 1층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자마자 단지 안 벚꽃 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게 보였다. 어쩐지 기분이 들뜬다. 근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짹짹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게 분위기를 더하고,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살랑이는, 이 순간을 놓치지 싶지 않은 조바심이 훅 끼친다.
“와, 분위기 너무 좋다. 밖에 나와서 책 읽어야겠어.”
운동하러 가는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선언하듯 말하고는 얼른 집으로 올라가 선크림을 야무지게 바르고 책을 챙겨 내려왔다. 단지 안에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미니 폭포와 연못을 바라보고 앉아 책을 읽는 내 모습을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아름다운 공간 속에 나를 두는 일. 최근에서야 깨달은 내 행복의 치트키다. 햇살 아래에서,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라탄 테이블과 의자로 꾸며진 휴게 공간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혼자 멍하니 경치를 구경하는 아주머니 한 분, 그리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두 분이 다였다.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한창 대화가 이루어지는 테이블과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책을 펼쳤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다. 몇 번 시도했지만 읽기에 실패했던 책인데, 열흘 뒤 예정된 독서동아리의 숙제라서 어제 주문해 둔 참이었다.
기대했던 햇살과 바람 덕분인지 책은 잘 읽혔다. 몇 년 전에 분명 읽었을 구절일 텐데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다. 봄이고 햇살은 따뜻하고 이렇게 여유를 누리는구나 은근하게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끼려는 찰나, 어디선가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떼를 쓰는 것인지 호소하는 것인지 고래고래 울어대는 통에 잠시 집중력을 잃는다. 다시 책에 집중해 몇 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대화를 나누던 어르신들의 말소리가 꽤나 잘 들린다는 걸 깨닫는다. 아까는 언뜻 부동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총선을 앞둬선지 여당이니 야당이니 하면서 점점 목청이 높아진다.
이제 겨우 머리말을 다 읽고 본격적으로 좀 읽어볼 참인데 도통 집중이 되질 않는다. 잠시 마음을 고르며 연못을 바라보는데, 이런.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나무 기둥 위에 앉아서 주변을 탐색하고 있다. 비둘기로 말할 것 같으면 특히 요즘 들어 내가 경기를 일으키는 대상이다. 원래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 강풍에 밀려 정면으로 달려들던 비둘기의 배를 가까이서 보고 기겁한 뒤로 트라우마가 생겼다. 발 밑의 비둘기를 갑자기 발견하기라도 하면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은 아찔함을 느끼며 결국 책을 들고 일어섰다.
불과 이십여분 간의 소동극을 마치고 터널터널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던가. 아까는 참 그럴싸한 풍경이었는데. 햇살과 바람과 책과 나. 상상했던 장면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실 몇 번이나 그랬었다. 그곳에서 방해 없이 독서가 가능했던 건 이른 아침뿐이었는데. 막연한 상상으로 기대를 품고 들어갔다가 실망하고 나온 꼴이다. 멀리서 보면 되게 좋을 것 같지만 막상 그 속에 들어가서 경험하는 세상은 자주 기대를 배반한다.
근데, 사실은 안다. 햇살과 바람은 기대했던 만큼이었다. 비둘기는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내 발 근처를 기웃거린다 한들 부리로 내 발등을 쪼지는 않을 것이다. 꽹과리를 치고 굿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일정한 시간을 견디면 여당과 야당도, 아이의 고함도, 비둘기도 초월해서 글 속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해 한참이 지나도 간직될 독서경험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안의 책>을 떠올릴 때마다 단숨에 따라올 나른한 봄날 오후의 기억 같은 것.
누구도 건네지 않은 기대를 저 혼자 지레 품었다가, 기대의 한쪽 구석이 찌그러지자마자 토라지듯 접어버렸다. 중요한 몇 가지를 붙들고 좀 더 참아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글을 써 내려가는 사이, 딱 이만큼이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아니었나 뜨끔하다. '재능은 긴 인내심이다.'라는 작가 플로베르의 문장을 발견하고 괜히 안심했던 적이 있다. 인내심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고 착각했었나 보다. 오늘 새삼 깨닫는 바, 실망감에 취약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야말로 인내심. 아무래도 계속 써나가야겠다. 재능도 욕심나지만, 글을 쓰면서 점점 나를 알아나가는 게 참 기분이 조크든요. (2024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