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에 반하다
장릉을 둘러보고 나오니 이제 그만 숙소로 가고 싶어하는 남편의 의중이 느껴졌다. 나는 다급한 마음이 되었다. 이동하는 짬짬이 조수석에 앉아 검색해 둔 카페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가장 가까운 카페를 냉큼 대령했다.
"여기 엄청 가까운데? 분위기 너무 좋은 것 같고. 1시간만 앉아있다가 가자~(뿌잉뿌잉) "
비위가 약한 남편은 못 이기는 척 내 뜻에 따라 주었다.
포털에서 본 사진으로는 넓은 뜰을 가진 것 같았던 그 카페는, 직접 가보니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상당히 아늑한 맛이 있었다. 카페 내부의 모든 자리가 제각각 개성 있게 세팅되어 있으면서도 조화로웠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한산해서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었고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야 두어 팀이 입장했을 뿐이었다. 음료를 주문한 뒤, 창이 정면으로 보이는 가죽카우치에 거의 눕다시피 앉았다.
호기심 때문에 주문한 옥수수슈페너를 두고 맛있네, 맛있어 정도의 말을 주고받고는 남편은 스마트폰을,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쥐고 각자의 할 일을 했다. 이렇게 침묵을 공유하는 시간에도 특별함이 있다는 걸 그로부터 몇 주 후 혼자 OO여행을 하면서 배웠다.(그 이야기는 커밍 쑨)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나른한 햇살이 창으로 길게 들어왔다. 여행을 마치고 남는 것, 내가 여행으로 갖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나란히 앉아 햇살을 받는 조용한 기억 한 줌일지도 모른다.
한 시간 정도 쉬었다가 숙소로 향했다. 사진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허름한 모텔은 아니었다. 새롭게 건물을 정비한 것 같았고 객실 내부도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객실 호수가 적힌 팻말의 조명이 투숙객 유무를 알려주었는데 모든 불이 켜진 걸 보니 미리 예약을 한 게 다행이었다. 근처에서 간단히 생선구이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를 몇 가지 사서 돌아왔다.
‘최고급 침구 사용’이라는 모텔의 홍보문구가 무색하지 않게 뽀송하고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모로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연신 킥킥대며 재생시간이 150분이나 되는 <연애남매>를 시청했다. 연애 예능인줄 알았지만 실은 가족 예능이라서 울컥하는 대목들이 많았다. 여행을 와서 등 돌린 채 혼자 스마트폰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나를, 남편은 전혀 타박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같이 보자고 조르지 않았다. 11년 차 부부의 짬바였다.
다음날 아침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하고 별마로 천문대로 향했다. 별과 마루(정상), 고요할 ‘로’의 합성어로 ‘별을 보는 고요한 정상’이라는 뜻을 가진 천문대는 '영월 가볼만한 곳'을 검색하면 단골로 언급되는 장소였다. 공사 중이라 천문대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자가용으로 접근이 가능했다. 3월 중순부터 개방한다고 안내가 되어 있었는데 그때는 반드시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단다.
숙소 근처를 걸어서 돌아다닐 때, 멀리 산 정상의 천문대가 보였다. 저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궁금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느라 어지러움마저 느꼈지만 마침내 도착한 천문대 마당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슴이 탁 트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왜 늘 이렇게 아름다울까. 멀어서가 아닐까. 크고 작은 소란들이 보이지 않으니 별을 보지 않아도 이름처럼 고요했다. 아침 햇살 아래 한참을 서서 도시 영월을 내려다봤다. 살균이라도 되는 기분이었다.
아침을 거른 터라 출출했다. 적당한 맛집을 이미 찾아두었고 아무래도 웨이팅이 없을 것 같은 열한 시로 방문 계획을 세워두었던 참이었다. 목적지는 묵밥을 파는 곳인데 남편이 제안했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간판의 모습과 식당 앞 너른 공터가 어디선가 본 듯했는데 알고 보니 신서유기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출연자들이 맛에 감탄하던 장면이 생각나 더욱 조바심이 났다.
도토리묵밥과 생감자옹심이, 그리고 감자전을 주문했다. 너어어무 맛있었다. 쫄깃한 식감과 정갈한데 깊은 국물맛이 특히 좋았다. 영월 여행에 대한 만족도가 몇 칸 더 상승했다. 특히, 상에 깔린 반찬 중에 토마토 장아찌가 있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음식이지만, 어찌나 맛있던지. 나올 때 망설임 없이 포장주문을 했고 집에서도 한참 냠냠 쩝쩝 맛있게 먹었다. 우리가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이른 시간을 공략한 보람을 느끼며 붐비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대개 여행 코스를 내가 결정하곤 했는데 이번 여행의 경로는 거의 남편의 결정이었다. 주천묵집에 온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근처에 남편 후배가 적극 추천한 장소가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달 와이파크’라는 이름을 가진 복합문화공간이었는데 영월을 young과 달(월)로 해석한 작명이었다. 이런 작명 센스, 나는 반가워서 못 참는다. 추천을 받았을 때만 해도 어떤 곳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식당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그곳을 멀리서 보는 순간 ‘아!‘하고 알아버렸다.
입구부터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마치 대나무처럼 보이는 새빨간 기둥들이 새파란 하늘빛 아래 강렬한 기운을 뿜어냈다. 가까이서 보니 대나무가 아니라 금속 기둥들로 만든 조형물이었다. 나도 모르게 계속 감탄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포토 스팟이었다. 그 순간부터 쉼 없이 사진을 찍어댔던 것 같다. 간단히 검색을 해보니 원래 술샘(=주천) 박물관이 있던 자리를 더욱 확장해서 강릉원주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인 최옥영이라는 공간디자이너가 기획한 현대 미술 전시관이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처음 만나는 공간은 목성이었다. 태양계의 목성이 아니라 나무 목, 목성이었는데 온통 나무였다. 수많은 나무 조각들을 엮어서 판테온 스타일의 거대한 공간을 만들었으니 굉장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천장에 나있는 동그란 창에서 내려오는 빛이 황홀했다. 이런 식이었다. 관람동선을 따라 갖가지의 흥미로운 공간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실컷 사진을 찍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공간들이었다. 내가 여기를 왜 이제 알았지? 그게 의아할 정도였다.
아름다웠다. 넓은 부지에 실컷 예술적 재능을 펼쳐놓은 것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입구에서 본 순정한 빨강이 전시 공간 중에도 있었다. 금속으로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어놓았고 거기를 걸어서 통과할 수 있었는데, 나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모든 면이 철제로 된 망 형태였는데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여서 구조물 위를 걷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사실 좀 놀랐다. 이 공포의 정체는 무엇인가. 남편은 쩔쩔매는 나를 보면서 웃었다.
매 순간 상상했던 것 같다. 바닥이 꺼지면 어떡하나? 그래서 떨어지면 어떡하나?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고 그간 높은 건물에서 바닥이 꺼질까 봐 걱정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단지 발 딛고 선 철제 망 사이로 훤히 바닥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공포에 떨었다. 나는 어느 시점에선가 멈추었고 남편 혼자 올라갔다가 내려왔는데 그 사이 어느 가족이 우리가 있는 공간에 들어섰다. 부모를 따라온 두 아이 중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 아이가 무섭다고 엉엉 우는데 나로선 참 멋쩍었다. 나도 네 맘 알아…
전시공간을 다 둘러보는 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소감을 나누었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여행이었다고 단숨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또 손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가족 단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영월에서 보낸 1박 2일이 아주 귀하게 느껴졌다.
마침 내가 휴직 중이었고, 남편의 휴무였다. 날씨가 끝내주게 좋았으며, 남편이 짠 관광코스는 탁월했고, 기가 막힌 맛집들을 만났는데 웨이팅은 없었다. 방문하는 곳마다 사람이 많지 않거나 많아지려 할 때 빠져나왔다. 특히, 안녕히 무탈하게 잘 넘어갔다 왔으니 영월 이름값을 그대로 누린 셈이었다. 영월이 선물 같은 볼거리, 먹을거리들을 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필연적인 기쁨을 느꼈다.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즐겁고 귀한 여행을 마치고 이렇게 여행기까지 남김으로써 이제 영월은 우리 부부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특별한 여행지가 될 터다. 이게 다 누구 덕분인가. 영월을 제안해 준 나의 뮤즈, 남편에게 무척 고맙다. 그나저나 여보, 다음에는 어디 갈까? 벌써부터 남편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뿌잉뿌잉 (2024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