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호구의 고백
소비의 시대다. 드라마 주인공이 내용과 상관없이 무선청소기를 집어 들어 청소를 하고, 수사 중인 형사들이 바쁜 틈을 쪼개 샌드위치를 먹으러 간다. 파우치에서 멀티밤을 꺼내 눈가에 바르는 배우는 촉촉해서 좋다는 대사를 잊지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출연자들이 상표가 잘 보이도록 신경 써서 음료수를 마시고, 상당한 구독자를 확보한 유튜버들은 브이로그로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 척 상품을 노출시킨다. 평생 봐야 하는 광고의 양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앞 광고, 뒷 광고.. 광고들 천지다. 목적은 하나. 나의 지갑을 여는 것.
소비가 없이는 굴러갈 수 없는 자본주의의 바퀴를 돌리는 동력은 어쩌면 돈이 아니라 광고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재미있는 콘텐츠들을 보기 위해 참아가며 광고를 보지만, 사실 저들은 광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노출시키기 위해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유튜브 콘텐츠를 보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치고 들어오는 광고들을 참아내야 하고 만일 그게 싫다면 한 달에 만원 남짓한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다른 어플들도 마찬가지다. 광고를 봐주어야 하는 소비 사회 구성원의 충직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구독료의 방식으로.
지갑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한정된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 사람의 가치관, 정체성과도 직결되어 있으니 어디선가 읽은 대로 당신의 지출내역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는 말은 당연히 옳다. 전에는 지출하지 않던 항목에 돈을 많이 쓰기 시작했다면 그건 당신의 삶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고,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예고일 수도 있다.
실은 요즘 내가 그렇다. 지난 수년간 통신비라고는 핸드폰 요금이 거의 전부였다. 통신기기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예고 없이 등장한 코로나가 열어버린 원격수업 월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이 영상을 만들고 편집하는 기술을 습득했고, 수업에 쓸만한 자료를 찾느라 하염없이 유튜브 영상들을 봐대다가 중단 없는 영상 시청을 위해 프리미엄 서비스를 구독했다. 교육용으로 지급된 아이패드의 맛을 알고는 아이패드와 아이펜슬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개인용으로 주문해둔 상태다. 통신 기기와의 접촉이 잦아지다 보니 티빙, 웨이브, 넷플릭스를 넘나들며 콘텐츠들을 그야말로 흡수하고 있다.
통신비 지출이 늘고 통신기기를 사느라 돈을 쓰고, 또 그걸 꾸미느라 돈을 쓰면서도 이상하게 아깝지가 않은 것은 기술의 혁신을 봐버렸기 때문일 게다. 교실에서 칠판에 분필을 끼적이며 스토리텔링 기법에 의존한 수업을 해왔던 나는, 기껏해야 노트북을 통해 시각자료를 곁들여 역사를 가르쳐왔던 나는 비유하자면 백면서생이었던 셈이다. 달라진 세상, 더 넓은 세상에 눈을 떠버린 시골 선비는 도저히 전과 같은 인간으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개화기를 살았던 어떤 이들도 이런 전율을 느꼈을까. 퍽이나 역사적 순간을 살고 있는 기분이다.
지난 2년간 무수히 많은 프로그램, 다양한 어플들을 알게 됐다.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죄다 직관만 발휘하면 누구나 습득할 수 있을만치 조작이 쉽고, 가려웠던 바로 거기를 정확히 긁어주며 큰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솔깃하는 무료 서비스로 유인을 했다가는 기어이 지갑을 열게 만들 만큼 탁월하고 매력적인 기능들을 탑재하고 있으며 세상의 수많은 능력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어떻게 그것들을 활용하고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정말로 세상은 연결되어 있고 내가 허락하고 마음먹은 만큼 연결망은 확장될 수 있기에, 연결의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일에 기꺼이 돈을 쓰게 되는 것이다.
좀 전에도 어느 교사 유튜버의 영상에 자극받아 원대한 계획을 품고 패들렛 1년 이용권을 덜컥 결제했다. 어느 블로그에서 보고 반한 아이패드 케이스도 미리 구입해 두었다. 끊임없이 영업을 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는 지행합일의 경지에 오르기에는 너무도 미천한 나는, 소비 사회를 사는 호구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디지털 기술문명 예찬론을 펼치며 정신승리 중이다.(2022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