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강습 체험기
작년 7월, 수영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오랜 노력 끝에 맥주병을 탈출한 남편 후배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이참에 나도 다시 수영을 배워보리라는 다짐으로 끝나는 글이었다. 하지만 수영 단체 강습은 수강신청 경쟁부터 치열했고 몇 번 미끄러지면서 결국 강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가 아주 아쉬운 마음이었던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수영을 배우고자 했던 건 필요 때문이었지만 아주 얄팍한 필요였다. 여행 가서 호텔에 묵을 때면, 수영장에서 물장구나 치고 마는 것이 영 아쉬웠다. 비싼 호텔 숙박비에는 응당 부대시설 사용 비용까지 포함됐을 텐데 값만 치른 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게 아까웠다. 그리하여 올여름 나트랑 여행을 목전에 두고서야 수영 강습 생각이 간절해졌던 것이다.
단체강습은 어차피 가능성이 없으니, '숨고(숨은 고수)'라는 어플에서 내게 자유형을 터득시켜 줄 강사를 물색했다. 그렇게 연이 닿아 만난 강사에게 주 2회씩 4주, 총 8회 강습비로 32만 원을 치르고서야 3대 1 수영 강습이 시작되었다. 카톡으로만 메시지를 주고받던 강사를 직접 대면하고 보니 예상보다 젊었다. 유쾌한 분위기에서 수업을 받고 싶었던 내 소망과는 달리 선생님은 곁을 주지 않았고 내 기준 지옥훈련 같은 빡센 강습이 시작되었다.
다행한 것은 무척 열정적인 강사라는 점이었다. 60분을 꽉 채워 수업을 했고 숨고를 시간은 늘 1분 이내였다. 회당 4만 원의 강습비가 아깝지 않도록 나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나의 운동능력은 열정적인 강습을 감당하기에는 무척 하찮았다는 것. 실력은 더디 늘었다. 몇 바퀴씩 도는 연습을 할 때마다 내 순번은 늘 3번이었고 누군가 수업을 펑크내면 그제야 2번이었다.
실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학생으로 수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었다. 말로 한번 하고 지나가는 설명을 단박에 이해하고 몸으로 구현하는 일은 버거웠다. 부연 설명을 요청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설명대로 하지 않는 내가 그분 딴에는 답답했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의 세계를 선수 출신 수영 강사는 상상도 못 하리라.
학생은 고작 3명이었지만 실력 차이는 필연적이었다. 개인 일정에 따라 불규칙하게 수업 시간을 정하기 때문에 매번 같은 학생들을 만나는 건 아니지만, 똑같이 배워도 성취도에 차이가 나는 것을 학생인 내가 가장 먼저 느꼈다.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비교 지옥 속에서 위축되고 주눅 들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수영장에 가기 싫었다. 선불로 지급한 돈이 아깝고 나의 수영 실력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남편이 있어서 꾹 참고 다녔다. 강사에게 은근한 타박을 들을 때면 못하니까 이렇게 돈 들여 배우는 거지, 잘하면 뭐 하러 이렇게 시간과 돈을 투자하겠냐고 걸어오지도 않는 싸움에 맞서 항변하는 상상만 할 뿐이었다.
수영을 배우며 종종 ‘학교’ 생각을 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고 어떤 차이로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고 아무리 알고 있다 한들, 이해력이나 성취도를 가지고 점수를 매기는 공간에서 결과와 자신을 분리하여 자존감을 지켜내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하위권 학생들이 매 순간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기분을 견디며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겠구나 생각하니, 성실히 학교에 나온다는 것부터가 칭찬감인데 아차 싶었다.
어쨌거나 굴욕감이 싫어서 자습도 했다. 유튜브에 수영 관련 영상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같은 주제로 여러 강의를 찾아 듣다 보니 터득되는 바가 있었다. 강습이 없는 날에는 자유수영 시간표에 맞춰 가까운 수영장에 갔다. 킥판을 쥐고 초보 레인을 헐떡이며 오갔다. 몸으로 부딪치면서 얻게 되는 배움들이 많았다. 설명을 듣는 것과 몸으로 익히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갖가지 영법이 뒤섞인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보는 것도 유익했다.
그렇게 수영으로 가득한 한 달을 보냈다. 7월에는 나트랑 여행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무려 14번이나 수영장에 갔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수영을 하고 나서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귀가하는 길에 느껴지는 뿌듯함과 어느 호텔 수영장에서 힘 빼고 수영을 즐기는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킥판이나 숏핀의 도움 없이도 자유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운동으로 성취감을 느끼는 일은 귀한 경험이었다. 내게 뛰어난 운동능력이 있어서 쉽게 수영을 익힐 수 있었다면 맛볼 수 없었을 이 심정은 ‘감격’에 가까웠다. 고작 자유형을 할 수 있게 된 걸 가지고 감격씩이나 할 수 있는 것도 나 같은 저급한 운동능력 보유자들의 특권이었다. 성실하기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수영장에 드나든 나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한때 급훈으로 액자에 종종 걸려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전에 <노오력의 배신>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이 발간된 2016년 무렵 유행하던 신조어 중에 ‘노오력’이 있었다.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취업난 문제를 청년 개인의 노력 탓으로 돌리는 기성세대를 겨냥해 ‘큰 노력’을 노오력이라는 단어로 비꼬듯 표현한 것이다. 신조어가 발생한 상황도, 책이 제시한 문제의식에도 십분 공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은 든다. 지금 당장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 중에 ‘노력’ 말고 무엇이 있을까.
노력할 수 있는 자체가 큰 재능이다. 노력을 하는 데조차 방해물이 많기 때문이다. 결과에 대한 조바심,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 주변의 기대, 매몰비용과 기회비용 같은 것들에 대한 부담. 산란하게 일어나는 마음들을 다독여가며 포기하지 않고 집중력을 기울일 수 있는 능력. 어제 한 것을 오늘 또 하고 내일도 반복할 수 있는 마음과 실천들. 그렇게 이어간 노력은 목적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몸에 쌓인다. 근력으로도 자신감으로도.
투입과 산출을 계산기로 두드려 보면서, 이런 세상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냐고 한탄하는 소리가 종종 들린다.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자기 앞에 놓인 과제를 두고 최선을 다해 공을 들이는 경험은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왕 다니는 학교이고 기왕 치를 입시라면 말이다. 나도 다시 과거로 간다면 두 번째 인생에서는 처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 서울대를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삶의 양분이 될 경험을 위해서다. 경험은 ‘근력’이 되어 훗날 뭐라도 들어올릴 수 있게 될지니. (2024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