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복 Nov 26. 2024

물은 셀프, 자유도 셀프

아니요 싫어요 못해요

돌아보면 유년기 때부터 자유가 당연하진 않았었다. 뭐든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했으니까. 매일 엄마가 주는 100원으로 오늘은 뭘 사 먹나 정도의 자유가 있었을까.(그나마도 '엄마 기준' 불량 식품은 들키지 않고 몰래 먹어야 했다) 특히 우리 집에는 (키가 안 클까 봐 염려한 부모님의 조치로) 밥을 안 먹을 자유도 없어서 우리 삼 남매는 탈이 나지 않고서는 삼시 세끼 꼬박꼬박 밥상 앞에 앉아야 했다.  “나 아침 안 먹고 잘 거야.” 같은 말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가능했으니 내가 성인이 되어 갖게 된 자유란 고작 맘대로 밥을 안 먹어도 되는 소박한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학교는 더 억압이 심한 곳이라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걸 찾는 게 빨랐다. 야간 자습 시간에 소설책을 읽는 것도,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것도, 잠깐 엎드려 자는 것,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그때는 안될 일이었다. 머리 길이, 앞머리 모양, 교복, 스타킹의 종류, 신어야 할 신발까지. 모든 것들이 정해진 규칙 안에서만 허용되었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온 내게 그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다. 가져본 적이 없어서 빼앗긴 줄도 모르는 것, 그것이 자유나 권리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번 갖고 나면, 없이는 못 사는 것이 또 자유인지라, 고분고분하게 살아온 나도 강렬하게 자유를 갈망했던 경험이 있다. 결혼을 하고 2년쯤 되었을까. 시어머니는 속칭 기도빨이 좋다는 절에 함께 가기를 은근히 원하셨다. 그때만 해도 착한 며느리라는 타이틀이 탐났던지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따라나선 절은 엄청 으리으리했는데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면 거처하면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칸막이도 없고 개인 락커도 없는 넓디넓은 방에서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무수한 사람들과 공간을 공유하면서 기도하고 잠도 자고 쉬기도 하는 것이다. 훗날 템플스테이를 경험해 보니 그 가격에 그 환경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밥때가 되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는데 반찬이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밥 먹으러 간 것은 아니니까 큰 불만도 없었다. 당시 나는 그저 손주를 원하는 어머니의 기분을 맞춰주자는 생각에 기울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뭔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에게 어필하고 싶었을까. 주변의 기대에 따르느라 진이 빠지는 줄도 몰랐던 시절의 일이다. 일정은 총 4박 5일이었고 5일 차에 남편이 시어머니와 나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 와이파이는커녕 휴대전화가 안 터지는 산 속이라 매일 저녁 남편에게 공중전화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무궁화호 열차도 타보고 절에서 생활해 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일말의 기대는 철저한 착각이었다. 나를 가장 못 견디게 했던 부분은 개인 공간이 없다는 점도 밥이 맛없다는 점도 아니었다. 바로 몸이 고되었다는 건데 잠자리가 편치 않고 등받이 의자 하나 없어서가 아니라 노동을 강요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절은 천태종 계열이었는데 노동을 수행의 방법으로 여겨서 그러는 것인지 뭔지, 기도하러 온 나 같은 신자들에게 자꾸 일을 시켰다. 아예 체계적으로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니 이렇게 저렇게 역할을 나누어 배분하겠다 선포하기라도 했다면 참을 수 있었을지도. 그게 아니라 말 그대로 불쑥 일손을 요구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밥을 먹고 식당을 나오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손목을 붙잡는다. “보살님, 설거지 좀 같이 하자.” 네?? 처음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가면 그렇게 붙들려온 사람들이 모여서 미친 듯이 설거지를 하게 되는 거다. 나중엔 요령이 생겨서 다른 일을 돕기로 했다고 둘러대기도 했지만 황혼기의 여성이 주류를 이루는 그 공간에 나 같은 젊은이(당시 나는 삼십 대 후반)는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날 잡아 잡숴라 하는 마음으로 요청에 응했다가 비탈진 도라지밭에 앉아서 땡볕 아래 김매기까지 해야 했다.


고된 노동을 강요받는 일이 반복되면서 분노 게이지가 차곡차곡 쌓였다. 나에겐 그 모든 게 고스란히 노동착취로 여겨졌다. 처음부터 고지를 해서 동의를 받든가, 체계적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든가, 아님 내가 하는 노동의 의미를 종교적 수행으로 이래저래 엮어서 설득이라도 하든가.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서 해야 하는 청소, 빨래, 식재료 손질, 설거지, 심지어 농사 같은 일들을 신자들의 무료 노동으로 때우고 있다니! 그것도 자의가 아닌 강권의 형태로. 길 가다가 손목을 붙잡히면 그대로 노동 현장에 투입된다는 사실이 천부당 만부당하여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4일 차 오전, 나는 필사의 탈출을 했다. 경비가 있어서 막는 것도 아니었지만, 일평생 순순하게 살아온 내가 목적지도 없는 충동적 일탈 행동을 해버렸던 것이다.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절의 문턱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계속 걷다 보니 카페가 보였다. 저기다! 찾았다! 나의 해방구! 산소가 없는 우주 공간에서 산소 탱크라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들고 나올걸. 집에서 챙겨 온 유일한 책이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었는데 나를 지키려고 뛰쳐나온 이 마당에 읽을 책으로 딱이지 않나.


드디어 마시게 된 익숙한 공기 속에서 나는 자유를 느꼈다. 그리고 나에 대해 새로 알았다. 순순히 살아왔지만 그게 나에게 딱 맞는 모양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저 순순하게 길러졌을 뿐이라는 것을. (너무 당연하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차를 앞에 두고 책 한 권 없이 멀뚱히 있던 나는 벌떡 일어섰다. 카운터 앞으로 가서 사장님께 말했다. “혹시, 볼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사장님은 볼펜을 내밀었고 나는 그걸 받아서 내가 느끼는 억울함, 분노, 자유를 향한 갈망 같은 것을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 위에 마구 적어 내려갔다.


그때 그 냅킨을 보관하고 있어서 내가 그 얘기까지 여기에 끼적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냅킨은 없지만 기억은 생생하게 남았다. 두어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터벅터벅 걸어서 절로 돌아갔다. 시어머니에게는 또 붙잡혀서 일을 하고 왔다고 둘러댔다. 냅킨 몇 장과 볼펜 한 자루의 위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날 카페에서 쓰기를 도구삼아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덕분에 다시 기분이 괜찮아졌고, 그 후로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당당했다. 나에게는 노동착취를 당하지 않을 분명한 자유가 있고 이곳의 질서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방식대로 행동할 뿐이니까 거짓말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을 망정 명백한 정당방위였다.


애초에 기도빨 같은 건 믿지도 않았지만 상당 시간 노동에 시달리느라, 울분을 견디느라 마음을 차분히 할 틈도 없었다.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인질 삼아 돈벌이를 하는 그 으리으리한 절을 향해 이를 갈면서 나가기만 하면 어디에 항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사건이 상처가 아니라 무용담으로 남았다는 건데, 그건 내가 작게나마 저항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영화 <혹성탈출-진화의 시작>에서 인간을 위한 실험체로 쓰였던 유인원들의 대장인 시저가 바야흐로 각성이라는 것을 하고 처음 내뱉은 인간들의 단어, 그것은 “No!!!”였다. 그날 내가 절 밖으로 뛰쳐나오는 행위도 바로 그 ”No”였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지만, 고스란히 억압을 당하지는 않겠다는 울분을 품고 도망이라도 친 덕분에 나는 덜 다쳤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무심코 찌그러트린 내 존엄성을 조금이나마 지켰다. 그 사건은 내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알려 주었다.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영역, 감당 못하는 괴로움의 형태와 싫어요를 외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나는 내가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동안 살아온 모양대로 끝까지 참으면서 노동현장으로 끌려 다녔다면 4박 5일을 마친 뒤 그 울화로 남편 앞에서 미친X 불꽃쇼를 펼쳤을지 모를 일이다.


자유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을 때 이런 이야기까지 털어놓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몇 줄 쓰자마자 대뜸, 자유를 찾아 도망치듯 바쁜 걸음으로 절을 빠져나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쓴다는 행위가 구원이 되려면 무엇보다 솔직해야 할 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쓰고 나니 내 안에서 시원한 바람이 분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바람을 타고 물 위를 떠가는 종이배 같은 내 글을 지켜본다. 어디로 흘러갈지, 첫 줄을 쓰는 나는 모른다. 배는 표표히 흘러서 어딘가로 닿고 그 지점이 썩 마음에 들어 마침표를 찍을 때, 나는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 진심대로 행동한 보상이렷다. (20241121)

이전 08화 당신만 그런 게 아닙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