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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복 Dec 03. 2024

식탐을 잠재우면 생기는 일

쳐다보면 커진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의 유행은 바지를 길게 입는 것이었다. 발등을 덮는 정도가 아니라 말도 안 되게 길게 입어서 바지 밑단이 바닥에 질질 끌려 뜯어질 정도. 그게 어떻게 유행이었을까 싶은데 정말로 그랬다. 그래서 좀 논다 하는 아이들은 바지를 안으로 접어서 바늘 몇 땀으로 살짝 꿰매고서 교문을 통과했다가 학교 안에서는 다시 바지를 길게 늘어뜨렸다.


대학에 가니 이번엔 통바지가 유행이었다. 상의는 이른바 쫄티라는 것을 입어 몸매를 드러내고 하의만 부풀려 입는 식이었다. 그로부터 수년 뒤에는 다시 스키니진이라 해서 입고 벗기가 힘들 정도로 달라붙은 바지가 유행이었고 그 유행은 또다시 바뀌었다.


매번 달라지는 유행에 따라 나도 바지를 길게도 입어보고 통바지도 사 입고 다시 스키니진도 한동안 즐겨 입었다. 유행이니까 따라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다. 자꾸 보니 내 눈에도 예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스키니진이 예뻐 보이는 눈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통 넓은 바지는 세상 촌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손이 가질 않았던 거다.


유행이란 게 이렇다. 뭐 저런 게 유행이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도 자주 보게 되고 어느새 눈에 익으면 또 그게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다. 볼 때마다 뇌가 반응한다. 설렘설렘 삐뽀삐뽀. 서두가 길었는데 내가 하려는 얘기는 이거다. 계속 쳐다보면 커진다는 것. 꾸준히 관심을 주면 내 안에서 그 존재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광고를 하는 이유고, 바이럴 마케팅이 효과를 발휘하는 원리일 터다.


쳐다보면 커진다는 사실을 요즘 절절히 실감하고 있다. 현재 나의 최대 관심사는 건강한 식생활인데,  습관을 바꾸어나가는 과정에서 깨닫는 게 내가 그간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를 얼마나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고 매번 쳐다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먹는 낙으로 살았다. 먹는 건 물론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 문제긴 한데 방점은 ‘너무’에 있다. 너무 쳐다봐서 너무 커져버린 존재감.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오래된 속담에서부터 시작해서 맛있으면 0칼로리라는 비교적 최근의 말들까지 죄다 먹는 행위를 전적으로 부채질한다. 온갖 매체에서 다양하게 변주된 형태의 먹방(요리 대결, 맛집 소개, 여행, 심지어 일상 관찰 예능에서도)이 시도 때도 없이 식욕을 자극한다.


이 물건을 가져봐. 그럼 너는 더 멋진 사람이 될 거야. 이런 집에 살아봐. 당신은 남들과는 격이 다른 사람이 되는 거야 라는 홀림처림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입에 넣고 미간에 인상을 찌푸려가며 맛있다는 말을 이렇게 저렇게 늘려 말하는 출연자들의 모습은 여지없이 유혹적이다. ‘이걸 먹어봐야 인생의 참맛을 아는 거야. 이것도 모르고 너 무슨 재미로 살아?’


얄궂게도 세상에 먹어봐야 할 음식은 차고 넘치고 맛집은 끝없이 생겼다 사라지고 또 생긴다. 화려한 볼거리에 부합하는 자극적인 맛을 가진 음식들의 진도를 따라가는 사이 건강한 식생활에서는 조금씩 멀어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제 발로 따라가는 것 같지만 이 정도면 외부의 압력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배달 어플을 열어두고 오늘은 뭐 시켜 먹을까 고민하는 삶, 거나하게 외식을 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어떤 디저트를 사들고 갈지 고뇌하는 삶은 내가 선택한 거였지만 그때마다 느끼는 건 식탐 내지는 식욕에 끌려다니는 개운치 않은 기분이었다. 지갑도 내 것이고 위장도 내 것인데 어쩐지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지 못한 것 같은 석연치 않은 찝찝함 말이다.


갑작스레 생긴 건강 이슈로 식생활을 고쳐보자 다짐했을 때 나는 일정 정도의 자유를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먹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제약은, 힘들어도 감내해야 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막상 경험해 보니 정반대다. 나는 오히려 더 자유로워졌다. 음식에 끌려다니지 않아서, 저 음식을 못 먹으면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지 않아서 훌쩍 자유로워졌다.


자유는 단순히 선택지가 많은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는 자유도 있지만, 내 마음대로 먹지 않을 자유도 있어야 하는데 식탐의 노예로 사는 동안에는 후자가 없었다. 한 끼라도 맛있게 먹지 않으면 크게 손해 보는 느낌. 남들이 다 열광하는 음식맛을 나만 모른다면 어쩐지 도태되는 기분. 건강이라는 명분도 식욕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끌려다니지 않고 차분하게 내가 결정하는 느낌. 중요한 것을 제대로 쥐고 있는 충만한 기분. 그게 내가 요즘 매끼 경험하고 있는 생생한 자유다. 여전히 맛있는 음식은 중요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식사를 하는 것이 삶의 큰 행복이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그것만을 내내 생각하고 쳐다보고 있지 않아서 나는 자유롭다. 한쪽이 과도하게 부풀어서 깨졌던 균형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나의 요즘 식생활은 지난 글 ‘본격 채소 친화적 식생활’에 적은 대로다. 채소를 많이 먹고 군것질은 하지 않고, 밀가루와 당은 제한하려고 노력하면서 한 달을 보냈다. 입이 심심하면 레몬수를 마신다. 늘 배가 고프지도 않고 먹고 싶은 온갖 음식들이 머릿속을 뱅뱅 돌지도 않는다. 음식을 향하던 관심의 스위치를 의도적으로 껐기 때문이고, 끌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간 내 관심이 그쪽으로 과하게 기울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덕분이다.


생각을 끈다는 게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건데 그게 내가 최근 들어 전보다 부쩍 자주 글을 쓰게 된 배경이다. 뭐 먹을까를 생각하던 시간에 무엇에 관해 글을 쓸까 머리를 굴린다. 간식과 야식이 남기는 것은 두둑한 뱃살이지만 글에 대한 고민이 남기는 것은 결국 글이다. 글을 쓰는 사이 복잡한 생각들이 명료해지니 글 이상의 것이 남는 셈이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하는 사소하고 반복되는 좌절들이 불혹 이후에도 여전할 줄은 몰랐었다. 늦었지만 이제야 (적어도 식생활면에서) 외부의 압력에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된 기분이다. 다행이긴 한데 의구심은 든다. 도대체 나는 몇 살까지 크려나. (202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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