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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심신 단련 11화

뒷목 잡고 심호흡

바람이 부네요

by 박기복

학생들에게 현대사를 가르칠 때 ‘계엄령’이라는 개념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기존의 배경 지식과 연결고리가 생겨야 배움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인데,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라는 문장은, 상징 가득한 시구절처럼 막연할 수밖에. 그래서 부연 설명을 많이 했던 게 기억난다.


지난 12월 3일 밤, 느닷없는 비상계엄령 선포 소식 이후, 헬기를 타고 날아든 계엄군이 국회에 들이닥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목격하고, 맨몸으로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들을 보면서 엄청난 공포와 분노, 슬픔과 모욕감을 느꼈다. 그날 알았다. 실은 나도 그간 비상계엄을 글로만 알았을 뿐이었다.


3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몇 번이나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은 끔찍한 꿈은 아닌지. 역사 시간에 가르쳤던 암울했던 현대사가 다시금 재연되려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 누렸던 자유와 권리, 단단한 기반 위에 벽돌로 쌓아 올려져 있는 줄 알았던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가 국회에서 가결되기까지 어찌나 마음을 졸였던지 저절로 두 손이 모아졌다. 건강 문제가 있는 이 시점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일었지만 어쩔 수 없이 티브이 앞에 붙들려 있었다.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해제 요구가 가결되고 이어 계엄군이 국회를 떠나는 화면을 보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두 시가 되어갈 즈음 몸생각에 억지로 자리에 누웠다. 몇 시간 뒤 잠에서 깼을 때 계엄 해제가 완료됐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두 발 뻗고 지냈다…라고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내 불안에 떨었고 지금도 공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건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였다. 법치국가에서 법률도 아니고 하물며 헌법을 위반한 행동을 두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하고 어떤 여지가 허용되는 걸까. 연일 이어지는 뉴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1+1=2가 진실이라고 믿고 살았는데, 1+1의 값이 3이 되는 경우, 4, 5… 11이 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온갖 해괴한 증명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여서 너무 어지럽다. 나를 놀리는 것만 같다. “바보야, 누가 계산하느냐에 따라 답이 다른 거 몰랐어?”


선거 때만 대접받고 있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끝없는 국민 타령에도 현기증이 난다. 총든 군인을 앞세워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앗아가려 했다는 사실이 전국에, 아니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는데 집단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국민을 위하는 선택을 한다며 계속 국민을 욕보이고 있다.


분통이 터지는데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에 무력감도 느꼈다. 분노와 좌절이 함께 오니 결국 아까운 내 기운만 빠진다.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실 관계가 이토록 명확하고 정해진 법 절차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순리를 자꾸만 빗나가니 답답할 노릇.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지켜야 하니까 뒷목 잡고 심호흡하듯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나가는 중이다.


상실의 위협 앞에 서면, 머리로만 알던 것이 살갗에 닿게 또렷해진다. 건강 문제가 그랬고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그러하다. 한국의 현대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수많은 시민들의 피와 눈물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텐데. 그 귀한 것을 흔드는 바람이 분다.


금세 바람이 멎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나 왜 바람이 분거냐 이젠 희망이 없다 엉엉 우는 비관보다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살피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현실주의자의 태도만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고작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할지라도 캔버스 가득 찍힌 무수한 점들은 백억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명작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기꺼이 한 점 '시민'*이 되고 싶다. (20241210)


*시민: 국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나라 헌법에 의한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자유민(출처:네이버 어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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