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체크인은 3시였다. 좋은 방을 배정받고픈 마음에 서둘러 호텔로 와 이름을 말하고 예약 상황을 확인했다. "비전망으로 예약하셨네요."라는 호텔 직원의 말에 깜짝 놀랐다. "네에??" 부킹닷컴을 통해 숙소를 예약할 때 '비전망'이라는 단어를 못 본 것 같은데. 하지만 다른 일을 하다가 급하게 예약했던 게 생각났다. 다시 사이트에 들어가 확인해보니 이런 젠장. 비전망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시티뷰'라는 그럴싸한 용어가 적혀 있었을 뿐. 시티뷰가 비전망과 같은 의미임을 놓쳤다. 이 호텔을 예약한 이유가 청초호 뷰 때문인데. 아쉬움이 컸지만 어쩌랴. 오늘 또 하나 배운다. 곁에서 듣던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약과 관련한 나의 흑역사 때문이다.
때는 '나를 찾아줘'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2014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당시는 신혼이었고 조조 영화를 거의 매주 보던 시절이었다. 늘 가던 메가박스로 차를 몰았다. 이상했다. 극장이 너무 조용했다. 뭐지? 그제야 생각났다. 마침 영화 시간이 맞지 않아 평소 가던 데가 아닌 다른 곳에 예약했다는 사실이. 부랴부랴 차를 빼서 다시 CGV로 향했다. 조금 늦었다. 급히 상영관을 확인하고 입장을 했다. 문 앞을 지키는 직원도 없었다. 이미 캄캄해진 후라 아무 데나 더듬더듬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상했다. 부부가 주인공인 스릴러 영화로 알고 갔는데 웬 우주복? 상영 중인 영화가 '나를 찾아줘'가 아니라 '인터스텔라'였음을 5분이 지나서야 받아들였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영관 숫자를 똑바로 확인하고 들어왔는데 뭐가 문제지? 알고 보니 내가 예매한 티켓은 일요일 것이 아니었다. 다음 날인 월요일 것이었다. 장소를 틀리고, 요일을 틀려서, 틀린 영화를 봤다. 일부러도 이렇게는 못할 것이다.
호텔 직원은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향해 설악산이 잘 보이는 높은 층으로 배정해주겠다고 했다. 실제로 설악산이 훤히 보이는 19층 시티뷰는 나쁘지 않았다. 호수 뷰가 시티뷰보다 8만 원이나 비싼 것을 들은 남편은 나의 예약을 탓하지 않았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씨크루즈 호텔이었는데 고급 호텔은 아니지만 시설이 깨끗하고 침구가 특히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위치가 최고라 감히 추천하고 싶다.
티브이를 틀고 예능프로그램들을 띄엄띄엄 보다가 저녁 먹을 궁리를 시작했다. 어버이날에 친정식구들과 정육식당에 가기로 되어 있었던 탓에 저녁 메뉴는 무조건 생선회였다. 문제는 어디에서 먹는가였는데 이곳저곳을 고민하다가 동명항 수산 시장에 가기로 결정했다. '가성비'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바로 이 사람이다 싶은 나의 남편은 싱싱한 회를 싸게 먹고 싶어 했다. 스끼다시와 분위기를 포기하고 수산센터에 가서 아무 가게나 골라 흥정을 시작했다. 적극적이고 살가운 성격의 사장님은 5만 원 가격에 여러 생선을 플라스틱 소쿠리(바구니라는 표현보다 딱 적절하다)에 담아 주었고 매운탕용 홍게를 서비스로 챙겨주셨다.
소쿠리에 담긴 채 팔딱이는 생선들을 데리고 가게 뒤편으로 가니 회 뜨기만을 전문으로 하는 공간이 칸칸이 정렬되어 있었다. 생선값의 10%를 손질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데 무조건 현금이란다. 눈에 띄는 것은 벽에 붙어있는 가격판이었다. 초고추장, 고추냉이, 고추와 마늘, 상추 등이 각각 1000원에서 2000원 사이의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손질 비용까지 1만 2천 원을 지불하고 한참을 기다려 새 소쿠리에 보기 좋게 놓인 생선회와 검은 봉지에 담긴 매운탕 재료를 받아 들 수 있었다. 살짝 흥분된 마음을 누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빈 식탁을 찾아 앉고 소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매운탕 재료가 냄비에 담겨서 버너 위로 배달되었다. 매운탕 비용은 1인당 4000원. 이렇게 저렇게 보태고 나니 이게 과연 싼 게 맞나 싶긴 했지만 회는 확실히 싱싱하고 맛있었다. 생선들의 이름은 들으면서 까먹었다. (우리 사이에 통성명은 필요 없지.)
숙소에서 동명항까지, 그리고 다시 동명항에서 숙소까지 걸어서 이동을 했는데 가는 길보다 오는 길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술이 취해도 마찬가지였다. 속초의 구석구석을 구경한다는 기분으로 걸어오는 중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라이브 카페 겸 주점이었다. 나는 하이볼을, 남편은 맥주를 시켜 '아무거나'를 안주삼아 마셨다. 미안하지만 만족스러울 정도의 노래 실력은 아니었다. 다만, 밤이었고 취했고 눈앞에 호수가 보였다. 청초호는 바다와 연결된 호수라 정박된 배들이 여럿이었고 배가 보이는 풍경이 여행의 정취를 더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하늘이 흐렸다. 낙산사에 들를 계획은 접기로 했다. 아침의 절 풍경이 좋아 가려던 것인데 날씨가 흐리니 흥이 반감됐다.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하고 나섰을 때는 비까지 내렸다. 이제 목적지는 영랑호였다. 영랑호는 청초호와는 다르게 잔잔하고 고요한 느낌을 풍긴다. 작년 5월에 범바위를 보기 위해 왔다가 영랑호의 분위기에 반해 여름 휴가 숙소를 영랑호 리조트로 잡았었다. 시설이 너무 낡아서 뜨악하긴 했지만 아침에 영랑호를 산책하고, 자전거를 빌려 일대를 한 바퀴 도는 일정을 희망한다면 제격일 장소다. 차로 호수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비 때문인지 인적은 드물었다. 햇살이 좋았다면 참지 못하고 '파스쿠찌 속초영랑호점'을 반드시 들렀을 테지만 흐린 날이라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대신, 검색을 해서 찾은 카페는 '시드누아'였다. 카페는 나의 힘. 전생에 카페를 못가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나는 카페가 너무 좋고 여행 중 1일 1카페는 기본이다. 천장이 높고 빵이 맛있는 곳. 게다가 식물 카페라고 하니 당장 합격이었다. 카페 주차장에는 이미 차가 많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종합되어 있었다. 높은 천장, 밖이 훤히 보이는 통창, 식물들, 단순하지만 조화롭고 섬세한 인테리어. 나중에 안 것이지만 화장실의 모던한 분위기까지.
감자빵은 강원도 어느 빵집에서든 내놓는 메뉴라 겉모습에만 힘을 준 것이려니 했는데 기대를 훨씬 능가했다. 다른 데서 파는 감자빵도 이럴까. 잊기 힘든 맛이었다. 핸드드립 한 커피맛도 좋았지만 커피를 담아낸 머그잔의 빛깔은 또 어찌나 오묘한지. 자꾸만 고려청자 생각이 났다. 검색을 해보니 서울에도 본점이 있었다. 속초에 반복해서 오는 것에 이미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남편 때문에 당분간은 속초행이 어려울 것 같았는데, 다행이었다. (그렇다. 좋은 것을 발견하고도 새로운 좋은 것을 찾아 나서는 이가 바로 남편이다.)
카페를 나와 차로 5분 거리의 '대청마루'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도 지난번 여행 때 왔던 곳이었다. 자극적이지 않게 양념장을 바른 황태구이는 밥도둑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 기억을 좇아 찾아왔는데 그런 사람이 우리만이 아니었는지 또 한참 이름 불리길 기다리고 나서야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주문하던 순간 일어난 식탐 덕에 감자전까지 시켜 위장이 가득 차게 과식을 해버리고 말았지만 후회는 없다. 또 언제 온다고.
돌아오는 길은 길었다. 차들이 참 많았는데 토요일이었고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강원도를 벗어나면서 신기하게 날씨가 달라졌다. 집이 가까워 올수록 기분이 좋았다. 편안하기로는 역시 집만 한 곳이 없지 않은가. 여행의 추억을 안고 다시 힘차게 일상을 살아낼 것이다. 여행으로 일상을 달래고 일상이 여행의 비용과 가치를 떠받친다. 여행과 일상은 서로를 끊임없이 북돋운다. 마주 보고 선 두 개의 거울처럼.
여행기를 쓰다 보니 마음 안에서 뭉게뭉게 행복감이 피어오른다. 시간이 흘러 이 기억이 희미해진 어느 날, 이 글을 읽고 다시 웃게 될 것을 믿는다.(2022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