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옷이 있어도 옷을 삽니다
옷에 관심이 많다. 최신 유행에 밝다거나 잘 차려입고 다니는 건 아니다. 다만 내 마음에 흡족하게 옷을 골라 입는 일, '곤도 마리에'식으로 표현하자면 설레는 옷을 입는 일에는 진심인 편이다. 신발은 마음에 드는 걸 하나 사면 질리지 않고 주야장천 신고 다니고, 가방 역시 데일리 백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게 365일 같은 걸 들 수 있지만, 이상하게 옷은 사도 사도 만족이 되지 않아 금세 또 사고 싶어진다.
대학 시절에는 이대 앞이나 명동을 다니며 보세 옷을 사 입었고, 직장을 얻어 돈을 본격적으로 벌기 시작하면서는 백화점, 아웃렛, 보세를 골고루 기웃거렸다. 삼십 대 중반에 동대문 제일평화시장을 알게 돼 종종 방문하고 있다. 브랜드 옷이 입고 싶을 때는 프리미엄 아웃렛을 찾는다. 돌아보니 옷에 대한 나름의 애정이 꾸준했건만 그렇다고 옷을 잘 입고 다녔던 때가 있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늘 평범했다. 자주 촌스러웠다. 패션에 대한 철학 같은 것이 있지 않았고 그냥 새 옷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옷에 대한 나의 태도는 욕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원초적인 갈증 같은 것인지 몰랐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는 게 아니라 물이 보이니까 마시는 사람처럼. 그냥 무작정 옷가게를 기웃거렸다.
옷에 대한 아주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생 때였다. 저학년 때는 엄마가 골라주는 옷을 입었는데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둔 엄마는 자주 나에게 치마를 입혔다. 치마가 불편했는데. 나중에 직접 옷을 골라 입을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악착같이 치마를 피했다. 또 한 번은 엄마가 시장에서 티셔츠를 사 왔는데 칠부 티셔츠였다. 반팔도 아니고 긴팔도 아닌 어중간한 그 옷이 나는 너무 싫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옷은 분명 예뻤다. 다만 어린 마음에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예쁜 옷을 입는 일, 어울리는 옷을 입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시절의 일이다.
옷을 향한 갈증의 씨앗이 내 속 깊이 박혔던 건 고등학생 때인 것 같다. 중학교 땐 교복을 입었는데, 내가 배정받은 고등학교는 교복이 없었다. 복장에 대한 규제가 칼날처럼 살벌하던 시절인지라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 되는 갖가지 단서조항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큰 틀은 사복착용이었다. 문제는 당시 우리 집은 급하게 가세가 기울어 마음에 드는 옷을 마음껏 사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는 거다. 집안에 불어닥친 불운에 맞서 3년 터울의 삼 남매를 먹이고 가르치는 부모님에게 딸이 옷을 잘 입고 다니는 건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그때의 결핍이 사도 사도 옷을 사고 싶은 오늘의 나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좀 전의 비유를 수정하자면 나는 물이 보여서 마셨던 것도 아니고, 과거 한 때 목이 말랐던 강렬한 기억 탓에 지금 하염없이 물을 마시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에 글을 쓸 때는 어젯밤 동대문에 옷을 사러 간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옷을 향한 애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를 생각하다가 고등학생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너무 오래전이라 잊고 지내던 시절인데 그때의 결핍이 아직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쩌면 한 사람을 이루는 본질은 갖고 태어난 것, 살면서 쉽게 얻게 된 것보다는 갖지 못해 갈구했던 것, 노력해도 끝내 얻을 수 없었던 것, 살다가 잃어버린 것에 의해 좌우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도넛의 본질이 가운데 구멍인 것처럼 말이다. 기름에 잘 튀겨지도록 밀가루 반죽을 얇게 말아 양끝을 맞닿게 연결했을 뿐 구멍을 만들려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전형적인 도넛을 그리라면 대개 뚫린 구멍을 그려 넣지 않나. 결핍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엉뚱하게 발생한다. 그리고 꽤나 강렬하게 작동한다. (2022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