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관찰일기
몇 년 만에 부서 회식을 했다. 2차까지 마쳤음에도 8시 30분. 화수분 같은 레퍼토리를 가진 어느 선생님 덕분에 신박하게 즐거운 회식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간단히 장을 봤다. 들어와서는 곧바로 책상에 앉아 수업 준비를 했다. 내 수업 준비의 가장 큰 부분은 스토리를 짜는 건데 유난히 술술 잘 풀리는 느낌. 만족감을 느꼈다. 10시가 취침시간이지만 이것저것 할 일을 마치니 10시 반이 훌쩍 넘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약 16시간 전, 오늘 오전 7시)
겨우 씻고 나와 대충 머리를 말리고 대충 옷을 골라 입었다. 어제 종일 베지밀 1개와 귤 2개를 먹었다. 체중이 1킬로그램 줄어들었다. 딱 맞던 바지가 헐렁하다. 역시 맘고생이 다이어트에 직빵. 어젯밤 잠을 설쳐 피곤하다. 감정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 명민하지 못해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자책, 과중한 업무의 무게에 짓눌린 효능감 탓에 심신이 피로하다. 출근 준비를 마친 채로 요가매트를 깔고 누웠다. 눈을 감았다 뜨니 7시 40분. 주섬주섬 짐을 싸서 겨우 출근시켰다. 나를.
(다시 현재)
리듬을 회복한 데 안도감을 느끼며 자리에 누웠다. 자려다가 문득,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바꾸었을까를 생각해봤다. 회식이 즐거워서? 내일이 금요일이라서? 물론 전혀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한 끝에 얻어낸 결론은 이러하다.
나는 오늘 시간을 쪼개어 1학년 주제선택 수업의 생기부 특기사항 작성을 완료했다. 바꾸어 말하면 작지만 기특한 일을 해냈다. 당장 급한 건 아니지만 꽤나 부담스러운 미션을 일찌감치 완수했다는 성취감이 나에게 안정제 역할을 했다. 물론 학기말에 최종적으로 내용을 보태고 수정해야겠지만 26명 몫의 특기사항을 충실하게 적었다는 건 어깨 한번 으쓱할 수 있을 정도의 기특한 일이다.
내 경우엔 자아효능감이 손상될 때가 가장 마음이 힘들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피드백이 꾸준히 제공되지 않을 때 불안하다. 인정 욕구가 강한 탓이다. 해야 할 일이 폭주할 때도 효능감은 위협받는다.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삶이 피곤하고 자주 위기에 빠지는 나를 구해주고 싶지만, 노력도 해봤지만 어렵다. 어쩌랴 받아들일 수밖에.
외부에서 인정 욕구를 해소시켜 주지 않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해결하는 거다. 나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법은 실은 간단할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는 나, 밀린 일이라면 단숨에 처리하는 나, 내 몫을 당당히 해내는 나를 스스로에게 보여주는 일. 이때 중요한 건 매듭이다. 작더라도 한 건을 완료하는 게 큰 일의 일부를 한 것보다 낫다.
작은 성취를 반복하라는 어디선가 들어본 처방이 이렇게 효과적인 것이었다니. 내가 한없이 못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 고갈된 에너지를 바닥부터 싹싹 긁어모아서 할 일은 닥치고(불평불만, 자책, 신세한탄을 멈추고), 작지만 매듭이 있는 일 한 가지를 묵묵히 하는 것이다. 언젠가 또 자기혐오에 빠져 괴로움 속을 헤맬 때 이 글이 내게 보탬이 되기를.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작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는 작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쓴다." 나의 글쓰기가 나의 내면을 발견하고 발명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자주 되새긴다. 청하려던 잠을 잠시 보류하고 굳이 '나 사용설명서'를 이렇게 기록하는 마음도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2022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