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영화

<범죄도시 2>와 <그대가 조국>

by 박기복

말도 안 되게 하늘이 파랗다. 오늘 오전에만 해도 집안이 어둑할 정도로 날이 흐렸었다. 나가서 점심을 먹고 들어와 식곤증에 취해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하늘이 반할 만큼 아름답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깨끗하고 찬 바람이 들어온다. 사흘의 연휴가 끝나가는 저녁, 이제 정신을 차리라고 깨워주는 바람인가.


저번 주말에 <범죄도시 2>를 봤다. 1편을 재밌게 봤던 터라 누가 출연했든 간에 2편도 챙겨보았을 테지만 무려 손석'구씨'의 출연작이니 개봉하자마자 달려갈 수밖에. 범죄도시 시리즈의 악당은 사정없이 악한데 영리하기까지 하다. 상대하기가 영 까다롭고 캐릭터로서는 매력적이다. 다만 그들은 서사를 갖지는 못한다. 어째서 그렇게 악해졌는지 사연은 알 수 없고 덕분에 관객은 한 치의 마음도 빼앗기지 않고 그들을 증오할 수 있다. 대상으로서의 악일 뿐이다. 그런 악을 단죄하는 마석도 형사의 강철 주먹은 통쾌하고 후련하다. 그가 끝끝내 악당과 한판 대결을 벌여 상대를 묵사발로 만들어놓았을 때 덩달아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고 악당이 악한 것은, 안타깝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타격감은 크지 않다. 잘 만든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떠들면서 극장을 나선다. 영화는 영화로서 소모될 뿐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지방 선거가 치러진 날 저녁, <그대가 조국>이라는 영화를 봤다. 남편의 친구가 후원금을 내서 티켓을 받았는데 정작 그 아내분이 영화 관람을 거부하여 2장의 티켓이 우리 부부의 차지가 된 거다. 휴일 늦은 저녁시간으로 배정된 영화를 보기 위해 한 시간이나 걸려 신촌에 갔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몸살이 나도록 들었던 '조국'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를 보겠다고는 했지만 보기 전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 예상하는 그림이 있었고 받을 스트레스와 갑갑함이 뻔해서 부담스러웠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뉴스에서 보아온 장면들이 재구성되고, 설명이 명료해지고, 관련자들의 그날과 오늘이 교차됐다. 누군가는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초연했고 누군가는 빛을 잃고 일상이 무너졌다. 내가 느낀 가장 지배적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범죄도시 2>에 등장한 무서운 마체테는커녕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지만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휘두른 칼이 나와 내 가족을 향한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나는 거기에 맞설만한 능력이 없는 미천한 존재라는 자각이 들면 도리없이 두려워진다. 몸에 가득 문신을 새기고 눈을 치켜뜬 범죄자가 휘두르는 칼보다, 양복을 잘 차려입고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단단한 법 조항을 옆에 끼고 휘두르는 말이 더 무섭다. 국민들의 버팀목이 되어야 할 공권력이 사사로운 권력으로 둔갑하고, 권력을 견제해야 할 언론마저 권력의 등에 올라타 앞잡이 노릇을 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무력하게 짓밟힐 수밖에 없는 개미 같은 존재일 테지 라는 생각을 하느라 영화 후반부 내내 오들오들 떨었다. 분노보다 더 큰 두려움이라니. <그대가 조국>에 나온 양복 입은 빌런들 역시 어째서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 설명이 없지만 실제 역사 속에 그들의 서사를 짐작할 수 있는 힌트가 많을뿐더러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악이라서 아무리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한들 대상화되어 멀어질 수 없고 팔팔하게 살아 날뛴다.


하여, 글을 써야 했던 지난 수요일 나는 글을 쓰지 못했고 쓸 마음도 내지 못했다. 나 자신이 너무 작아져 있느라. 그런 영화를 보고 나서 아무 일 없이 소소한 일상을 끼적일 수가 없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조금 전 나의 공백을 염려하는 한 독자님의 연락을 받고 다시 뭐라도 써볼까 하며 지난주를 회고하다가 내 마음이 다쳤었고 추스르는 중이었음을 깨달았다. 태생이 겁쟁이인 나는 이 세상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 비극은 끝이 없고 희생자들은 계속 울고 있는 세상에 살면서도, 누군가 손을 깊숙하게 집어넣고 휘저어 얌전히 가라앉아있던 흙들이 떠올라 기어이 흙탕물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면 바보스럽게도 그제야 무서워 엉엉 운다. 몇 날 며칠 무서워 떨다가 두려워하는 일마저 힘들면 마침내는 차라리 미워하게 된다. 그래야 방관할 수 있으니까.


희망은 문이 아니라 어느 지점엔가 문이 있으리라는 감각, 길을 발견하거나 그 길을 따라가 보기 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딘가 있으리라는 감각이다. 때로 급진주의자들은 문을 찾지는 않고 벽이 너무 거대하고 견고하고 막막하고 경첩도 손잡이도 열쇠 구멍도 없다고 벽을 비난하는 데 안주하거나 문을 통과해 터벅터벅 나아가면서도 새로운 벽을 찾아댄다
-리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중에서-


어떤 영화의 빌런은 처음엔 드러나지 않는다. 말간 얼굴을 하고서는 선한 사람들 속에 숨어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체를 드러내 해를 가한다. 빌런을 일찍 알아보는 눈 밝은 관객이 되고 싶다. 넘쳐나는 말들에 피로해져 아무 말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서 누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분개하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를 걸러낼 밝은 눈을, 아니 끈질긴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어느 지점엔가 문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사방이 벽이라고 쉽게 단정하고 비관하고 방관하지는 말기로 하자. 할 수 있을까. (20220606)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