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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Apr 13. 2020

다시 시작하는 여정

마흔네 살의 삶을 뒤돌아 보다

 2005년 무더운 여름이 피부에 흘러내리는 8월, 갓 결혼한 남편과 나는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뉴욕 JFK 공항에서 펜스테이트(Pennstate)로 향하는 작은 비행기에 올라탔다. 우리가 미국 유학길에 오르는 그즈음, 늘 함께였던 친구들도 결혼, 출산, 집 마련 등에 분주히 자신들의 삶을 챙기고 있었는데, 남편과 나는 친구들처럼 평범하고 안정된 현실을 준비해 가는 여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1850년대 캘리포니아의 황금을 쫓아 자신들의 삶을 내 맡겼던 골드러시 시대의 개척자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개척하고 새로움을 쫓아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강했었다. 그리고 그 성공이란 의미 뒤편에는 소위 강남, 외제 차, 타인의  부러움이라는 세속적인 바람도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무수히 많은 개척자들 속에서 황금 광산을 찾은 사람들이 극히 소수였듯이 남편과 나의 유학생활도 그리 순탄치 만은 못하였다.


유학과 결혼 준비를 하기에 학생이었던 남편의 수입은 턱도 없이 모자랐고 나 또한 직장생활을 하였으나 살뜰하지 못한 경제관념으로 수중에 돈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모았던 돈 조차 평생에 한 번뿐인 ‘아름다운 결혼식’을 치르느라 다 써버렸다. 부푼 꿈을 안고 비행기에 오른 남편과 내가 가진 총예산이 정확히 오백 만원이었는데 오백 만원이라는 돈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우리들의 유학생활을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작은 돈이었다는 사실을 그 작은 비행기에서 내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곧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 우리의 유학생활은 참 고단하게 진행되었다. 통장의 잔고는 곧 100달러 미만을 내려찍는 날이 많았고 공부보다는 돈이 되는 뭔가를 당장 해야만 하는, 생활에 허덕이는 신세가 되었다. 남편은 장학금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했던 나는 결국 공부를 포기했고, 잡다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생활이 계속 진행되었다. 한 장에 8천 원 하는 한국 대학원생의 번역일부터 도서관 아르바이트, 실버타운 할머님들의 식사 준비, 안식년으로 오신 교수님 자녀들의 과외 등으로 매달 베니스의 상인에게 이자를 바치듯 월세를 준비하였다.


그렇게 1년, 2년... 생활에 우리를 내 맡긴 지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때, 남편은 꿈에 그리던 조교수라는 직업을 스웨덴 스톡홀름이라는 도시에서 갖게 되었다. 그런데 곧 남편이나 나나 우리가 보냈던 13년이라는 세월이 안겨준 황금 광산의 실체에 적잖은 실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생을 수직선이라 생각하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악다구니를 붙여가며 살아왔는데, 우리의 황금 광산이 위치한 곳이 아이러니하게도 수직선이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의 나라, 스웨덴이었던 것이다.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인정받기 위해 이렇게 올라왔는데 이 나라의 가치는 다 같이 행복해보자 한다. 미용사가 대학교수보다 월급이 많고 자동차 정비사의 자격증이 박사학위만큼 가치 있는 나라 스웨덴. 성공과 행복이 교차되지 않는 이곳에서 성공을 꿈꾸며 살아왔던 우리의 시간들은 무심히 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자주 얘기하는 헛헛함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우리가 올라왔던 그 줄을 자꾸만 내려놓으라는 이 사회의 가치와 무언의 압력 앞에 남편과 나는 성공의 뒤편에 교묘히 숨겨져 있던 우리의 이중적인 욕망에 대해 솔직해 지기로 하였다. 고생했으니 누릴 권리를 찾으라는 우리들의 ‘욕망’은 과연 이룰 수 있는 실체였던 것일까?


 우리가 유학생활에 치중해 있는 동안 한국과 미국 그리고 여타의 다른 나라들은 많은 경제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2008년 부동산 버블의 붕괴와 미국의 양적완화는 막대한 자본을 전 세계로 뿌려놓았고 수요와 공급의 파열음은 곧 세계 경제의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가진 자의 재산은 가파른 속도로 상승했지만, 없는 자에게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빠른 속도로 상대적 빈곤을 불러왔다. 이런 세계 경제의 흐름은 우리 주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아파트와 집에 투자했던 친구들은 어느새 올라간 부동산 가격에 기뻐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재산이 있었던 친구들 또한 어려움 없이 자산이 늘어나 있었다. 반면 성실했던 유학생활의 여정이 이끈 우리들의 황금 광산은 여전히 경제적 여유의 자유함이 없는 냉랭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처음으로 돌아가 과거의 나에게 물어보고 싶다. 무엇을 그토록 바랐는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와 부, 명예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고 여유 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었다. 그런 막연한 꿈을 그리며 끝을 모르는 사다리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사다리의 끝자락에 와보니 나의 막연한 꿈이 존재치 않는 시공간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거대한 흐름의 이 시공간은 나의 노력으로는 전복될 수 없는 자신만의 흐름으로 위풍 당당히 물살을 일으키며 휘몰아쳐 간다. 남편과 내가 꿈꾸던 우리들의 황금광산이 존재하리라 믿었던 시공간은 처음부터 이 거대한 물살의 흐름 앞에 존재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온 딸아이가 학교에서 수학 쪽지 시험을 봤다고 자랑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몇 개는 틀린 모양인데 선생님이 잘했다고 칭찬해준 것 같았다. ‘이 녀석이 반에서 몇 등 했길래 이러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다른 애들은 잘했어?”

하고 물어보았다. 딸아이가

 “나야 모르지”

하고 대답하였다. 집에 들어온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여기는 등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모든 성적은 절대평가이고 아이들은 남들이 얼마나 하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옆 동네 사는 공대를 다니는 한국 학생도 비슷한 말을 한다. 성적은 자기 것인데 왜 남에게 신경을 쓰냐고.


우리가 꿈꿔온 순수할 수도 있었던 우리 인생의 목적과 희망이 거대한 흐름의 시공간 앞에 마주하지 못하고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남들보다 ‘더’라는 상대성에 정체성을 잃고 색이 바래져 갔던 나의 삶이 안타까워진다. 그리고 남이 아닌 자신의 색 만으로도 충분히 반짝이는 딸아이가 참 예쁘다. 남들보다 ‘더’라는 비교에서 그 고유의 색을 잃어버린 채 떠돌아다니는 파랑새가 되어버린 나의 삶을 되돌아보니 행복이란 어찌 보면 나만의 색깔을 한 겹씩 입히는 과정에서 찾아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적 박탈감과 상대적 우월감이 늘 교차했던, 피곤했던 나 자신에게 이제는 무거웠던 타인의 시선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내가 가장 원하는 나의 색을 찾아 입혀 보고 싶다. 그리고 천천히 내가 원하는 색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정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

 

<길의 끝에 돛단배가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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