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랄라 Jan 21. 2020

무뎌져 가는 마음 다시 세우기

집시 소녀 루미를 기리며

   스톡홀름시의 슈퍼마켓 앞에는 누더기를 여러 겹 감싸 입은 집시들이 <헤이 헤이>라고 인사하며 종이컵을 흔드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처지가 힘드니 돈을 좀 줄 수 없겠냐는 그들만의 인사 방법이다. 현금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스웨덴이라는 사회에서 하루하루 행운을 기대하는 그들을 만날 때면 딸아이는 항상 묻는다.

   “엄마! 현금 있어요?” 물음표로 끝나는 말이지만 속 뜻은 엄마의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그들을 도와 주자는 제안이다. 힘든 처지를 공감하는 아이의 따뜻한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선뜻 지갑을 열어 아이에게 돈을 주곤 하였다. 아이는 기쁘게 그들의 종이컵에 자신의 사랑을 담아 기뻐하고 흐뭇해하였다.


   눈발이 간간이 흩날리는 작년 겨울, 일요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오는 데 교회 앞에서 <헤이 헤이>라는 인사와 함께 종이컵을 흔드는 중년이 훌쩍 지나 보이는 집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평소처럼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딸아이에게 건네 주려는 데, 이 날따라 아이가 돈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초록색 돈을 꺼내 그 집시 여인의 종이컵에 재빨리 놓아주는 것이었다.

   순간 집시 여인과 나의 눈이 마주쳤고 우리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지기 시작하였다. 집시 여인은 뜻밖의 거금을 얻었다는 기쁨으로, 나는 아이가 준 200크로나(우리나라 돈으로 이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의 출처를 묻는 동시에 그 큰돈이 집시 여인의 종이컵으로 쏙 들어가 버린 데서 오는 황당함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 찰나의 긴장감이 흘렀다. 곧 그녀는 너무나 기쁜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연발하며 아이에게 손을 흔든다. 아이도 밝게 손을 흔든다.


   아이와 그녀의 밝은 얼굴을 뒤로 한채, 나는 곧장 딸아이에게 급하게 따져 물었다


   “너 그 돈 어디서 난 거야?”

   “교회 집사님이 줬어요.”

   “집사님? 누구?”

   “OOO 집사님이요.”

   “그럼 엄마한테 말해야지, 그걸 저 사람한테 다 줘 버리면 어떻게 해? 얘가 정말!!”

   아이는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건 엄마 돈이 아니고 제가 받은 걸로 준 거잖아요. 그리고 오늘은 많이 주니까 더 좋은 거예요.”

.

.

.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이거 어찌해야지? 난감한 마음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교회 앞에서, 구걸하는 여인에게 아낌없이 자신이 받은 전 재산을 내어 주는 딸아이에게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까?


   엄마로서


   딸아이가 가진 것 없는 자에게 느낀 <나눔과 사랑>을 지지해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아이가 살아가며 만나게 될 <세상의 흐름과 경제>를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아이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우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아이와 함께 Welcome Nowhere이라는 영화를 시청하였다. 불가리아 집시에 관한 80분가량의 다큐멘터리였는데 나도 그 안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잔잔한 목소리의 내레이터는 불가리아 집시들의 역사와 처참한 삶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고, 화장실조차 없는 진흙더미와 유리조각 위에서 춤을 추는 아이들의 모습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불도저로 밀듯이 형성된 게토에서 최소한의 생필품마저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야만 하는 그들의 삶을 보고 있자니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으로부터 솟구친다.

   <젠장> 욕이 나온다. 부패한 정치와 결탁된 권력과 돈은 인간을 어디까지 유린할 수 있는 것일까?


   집시 소녀 루미는 언뜻 보아도 몸이 불편해 보이는 지체아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찾아온 알 수 없는 감염으로 그녀의 다리는 상처로 썩어 들어갔고, 결국 루미는 2010년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너무나 아프고 또 아팠던 것은 그 어린 소녀의 미소였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내내 카메라가 그녀를 비출 때면 어김없이 활짝 이를 드러내며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주었다. 병원을 갈 때도, 의사를 만날 때도, 그녀의 엄마와 함께 있을 때에도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참으로 아팠다.


   영화를 보고 아이에게 <현명한 나눔>을 가르치고자 했던 나의 결심은 오히려 딸아이가 보여준 <아낌없이 주는 나눔> 앞에 고개를 떨구었다.


   구걸하는 이를 도와주는 것이 그들의 자립심을 뺏는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해도 좋고, 그들을 돕는 행위가 선행을 했다는 졸렬한 자기 만족감을 배출하는 수단이라고 지적하여도 좋다.

   

   나는 딸아이의 마음을 지켜 주고 싶다. 또한 무뎌져 가는 나의 마음도 다시 세우고 싶다. 비록 현실적인 가계경제의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이 항상 숙제 이기는 하지만 아이가 여인에게 주었던 <나눔과 사랑>의 가치를 묵묵히, 천천히, 그리고 끝까지 지켜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시작하는 여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