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젊음은 찬란하다
나이 듦과 삶의 깊이는 정비례가 아니더라
그는 유학생 와이프 사회의 조인성이었다. 훤칠한 키, 날씬한 근육질의 몸매, 웬만한 여자보다 더 고운 피부와 하얗고 투명한 치아,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한 매너를 갖춘 그의 반듯한 인사성은 찌든 나날들을 하루하루 보내고 있던 유학생 와이프들에게 한때나마 자신들의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게 하였다. 대학원 기숙사 가족 아파트에 함께 지내던 갖가지 튀김을 맛있게 만들었던 은정 씨도 나처럼 그의 팬이었다. 창 밖으로 우리의 조인성이 어린 아내를 두고 기숙사 정원을 지나 학교를 향할 때면 은정씨나 나는 햇빛 아래 반짝이던 그의 옆모습이 조인성보다는 정우성을 더 닮았다느니, 그의 책가방이 오늘따라 너무 무거워 보인다느니… 등등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좋아하였다.
그에게는 딸인지 아들인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가가 있었다. 대학 시절 결혼을 하였고 대학 졸업 후 바로 들어온 대학원 1년 차에 아빠가 된 우리의 조인성에게는 그보다 더 어린 아내도 있었다. 한국인의 결혼 적령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매우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그와 그의 어린 아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지대하였다. 그의 어린 아내와 10년 이상의 나이차가 있던 우리들은 그 당시 그녀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선배로서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살림살이의 조촐한 팁부터 해외생활의 어려움 같은 자잘한 조언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무상 증정하고자 하였던 은정씨와 나는, 그러나 그녀를 만날 때마다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뭔가를 항상 얻고 왔던 기억이 있다.
영어를 잘하는 그녀로부터 한국식 발음을 교정받았고, 기저귀를 싸게 살 수 있는 쿠폰이나 별로 달지 않은 케익 만들기 레시피 등을 제공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어른스러움은 인생의 선배가 돼 보려던 우리의 자세를 아주 자연스럽게 교정시키고 있었다. 나이는 달랐지만 그녀는 동년배의 유학생 아줌마들의 친구로서의 관계 확립을 확실히 해 나갔고, 우리는 그녀를 나이 어린 늦깎이 동생이나 후배가 아니라 일종의 친구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20을 갓 넘긴 그녀가 30대 아줌마 대열에 당당히 들어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J.F.K 공항으로 들어선 남편과 나의 눈에 조인성의 뒷모습이 저 멀리서 보이는 것이었다. 키가 훤칠한 그의 옆으로 유모차를 끌고 아기 띠를 동여맨 어린 아내도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쳐 부르려는 데 우리보다 먼저 그 부부를 알아챈 일행이 그들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가다 오다 두어 번 인사하며 우리 부부에게도 안면이 있던 조인성의 한국인 유학생 친구들이었다. 직장을 다니다 30을 넘긴 늦은 나이에 유학을 온 유학생 커플이었는데 한국행 비행기가 이륙하는 게이트 앞에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한국을 가게 되어 조인성 부부도, 우리 부부도, 유학생 커플도 모두들 들뜬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가가 울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조인성 부부는 곧 숙련된 솜씨로 유모차와 기저귀 가방, 배낭을 동여 메고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 아기띠에 우는 아기를 옮기며 재빨리 우유병을 물리고 달래기 시작하였다. 아기가 그치지 않자 이번에는 엄마가 수유 포대기를 둘러쓰고 모유를 물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그치지 않자 우리의 조인성이 기저귀 가방을 메고 아가를 받아 화장실로 향하였다. 우는 아기의 소리가 멀찍이 들리면서 조인성의 아내가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쓸어 올리고는 분유통과 보온병, 우유병 등을 차례로 치우고 무거워 보이는 배낭가방들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방금 인사한 조인성의 한국인 유학생 커플이 보인다. 아기 띠 대신 유행하는 브랜드의 숄더백을 맨 곱상한 여학생과 젤 바른 머리 위로 선글라스를 멋지게 올려 쓴 그녀의 남자 친구가 비행기에서 볼 영화를 선정하는지 아이패드를 보며 한참을 재잘거린다. 얼음을 동동 뛰운 스타벅스 커피를 여유 있게 마시면서…
너무나 다른 두 장면이 적잖이 인상적이었다.
배낭 가방을 짊어지고 유럽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울 만한 소위 한참 좋을 나이에, 기저귀 가방을 메고 우는 아기를 들쳐업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우리의 조인성과 무거운 배낭과 유모차를 정리하는 어린 아내의 뒷모습에서 그들이 짊어진 부모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나이 들어도 아이 같은 사람이 있고 나이가 어려도 어른 같은 사람이 있다. 세월이 흐른다고 그 세월에 맞는 무게감이 나이 위로 더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조인성의 어린 아내가 은정씨나 나에게 오히려 언니 같았고, 우리의 조인성이 사실 그 당시 나의 남편보다 가정에 대한 살뜰함, 책임감, 무게감이 더 했던 것도 사실이다.
박사를 받다 남편이 학교를 옮기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던 우리들이 기숙사를 떠나가면서 리모컨이 잘 작동되지 않았던 T.V를 조인성 부부에게 팔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참으로 후회된다. 그냥 드리고 올 것을…
조인성과 그의 아내에게 준 것이 너무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가볍지 않았던 삶의 터전에서 젊은 부부가 보여 주었던 인생의 책임감과 무게감의 가치가 그들의 젊음과 아름다움만큼 빛나게 반짝거렸음을 훗날 혹여라도 만나게 된다면 꼭 이야기해 주고 싶다.